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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력 쏟는 著書와 평가대비용 논문 사이, 길은 없을까
공력 쏟는 著書와 평가대비용 논문 사이, 길은 없을까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0.10.18 15: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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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多作 교수들, 업적평가를 고민하다

논문이 100매의 분석이라면 책은 1천 매의 긴 호흡이다. 학자들과 치열한 논박 속에서 다져진 논문은 서서히 책이라는 숙성의 단계로 접어든다. 특히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자들에게 논문과 책은 선택이 아닌 과정이다.

그런데 요즘 인문학자들은 도통 책 쓸 시간이 없다. 출판 담당자들도 “책 쓸만한 교수가 없다”고 말할 정도다. 역량있는 모노그래프를 찾기 어렵다. 문제의 실마리는 논문 편수 위주로 짜여진 교수업적평가에 있다. 각종 대학평가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라지만 인문학 분야 교수업적평가, 개선의 여지는 없는 것일까.

교수업적평가가 논문의 양적평가에 치중돼 인문학 분야 교수들의 저술활동을 가로막고 있다는 문제제기는 새삼스럽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업적평가 이대로 안된다”

“연구논문 편수를 채우지 않으면 연구비가 제한되는 등 각종 불이익이 뒤따른다. 평가 대비용으로 할 수 없이 논문을 쓴다. 저서와 달리 에너지를 많이 들이지 않는다. ‘편수 채운다’는 표현이 딱 맞을 성싶다.” (지역국립대 ㄱ교수)

“등재지에 논문 싣지 않으면 학문적 역량을 평가할 근거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걸 감안해도 논문과 인센티브를 연결시키는 것처럼 알게 모르게 압박으로 다가온다. 결국엔 논문이 승진이나 강의 배정 등에서 어떤 식으로든 엮여있다.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다.”(서울 대규모 연구중심대학 ㄴ교수)

ㄱ교수는 정교수가 된 이후로 모든 연구 공력을 책 짓는 데 쏟고 있다. 지난해 논문 2편을 썼던 ㄱ교수는 단독저서 5권을 출간했다. 올해도 저서 2권을 내놨다. ㄱ교수의 총 논저는 논문 60여 편에 저술이 30여 권에 이른다.

ㄱ교수가 저술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논문 100매’가 좁게 느껴지면서부터다. 책을 쓰면서부터는 자기학문과 대중이 만나는 과정을 학자의 가장 큰 보람으로 삼고 있다. 지난해에는 10여 년의 공력을 들인 연구결과가 책으로 출간됐다. 논문으로 치면 50여 편에 달하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고 ㄱ교수는 자평했다. 만약에 ㄱ교수가 책 대신 논문을 썼다면 어땠을까. 등급여부를 떠나 논문 50편이면 각종 인센티브는 기계적으로 따져 봐도 수천만원이다. 업적평가 등 뒤따를 보상(?)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ㄱ교수에게는 출판사로부터 받은 수백만원의 인세비가 보상이라면 보상의 전부였다.

ㄴ교수는 올해 연구력이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할 만큼 괄목했다. 10월 현재 올해에만 논문 4편에 저서가 5권이다. 저서 5권 중 역서가 2편이다. 이달과 다음달에 책이 1권씩 더 발간될 예정이니 저서는 총 7권에 이를 전망이다.

이로써 ㄴ교수는 논문이 총 100여 편에 저서가 50권을 넘었다. ㄴ교수는 “자기 학문 영역에 갇히지 말고 넓은 시각으로 보려고 하면 다양한 주제가 보인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왕성한 저술활동을 해온 ㄴ교수도 “교수업적평가가 인문학 교수들의 저술활동을 발목잡고 있다”고 꼬집어 말했다. “인문학 분야에서 반발하니까 최근에서야 저서를 ‘일부’ 인정한 것이지 여전히 평가기준은 논문이다.”

논문은 교수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업적평가가 기계적인 글쓰기를 유도한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고 있다.
신임교수의 경우 인문학 분야임에도 ‘1년에 등재지 5편’을 계약조항에 못 박기도 한다.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내지 못하면 계약 편수의 2배를 등재지에서 소화해야 하는 경우도 일반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진 교수들 사이에 “젊은 교수들은 건드리지 말라, 술도 권하지 말라”는 말이 나돈다. ‘논문생산’에 치중된 업적평가 탓에 저술은 꿈도 못 꾼다는 게 인문학 교수들의 목소리다.

ㄱ교수도 신진학자를 비롯, 인문학 교수들이 논문생산에 치중된 구조를 우려한다. “제대로 된 저술이 나오려면 자기 학문분야에서 10년 이상의 내공(!)이 받쳐줘야 한다. 더 장중한 문제의식에 천착한 저술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저술평가도 학문 특성 고려하자”

대학평가의 끈을 놓지 않는 한 대학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저술평가를 본격적으로 확대하려 해도 계량화할 기준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저술을 부각시켰을 때 뒤따를 혼란도 문제다.

실제로 얼마 전 한 대학에서 학교 인근 복사가게를 출판사 삼아 출간하고는 저서로 인정해 달라는 교수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출판사도 선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조사대상 대학 중 나름의 출판사 평가기준을 가진 곳은 없었다. 학계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기려고 해도 세부기준안 등 보완할 게 많다.

최근 서울대 인문대학은 저술활동에 부여하던 가산점을 아예 없애버렸다. 계량적 평가의 한계가 저술활동에서도 예외없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언어학이나 고전시가의 경우 학문연구가 이미 활발하게 진행됐다는 점에서 오히려 새로운 내용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서울대 인문대학은 논문과 저술의 종합적인 평가를 위한 새로운 교수업적평가를 구상 중이다. 이르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1년 단위의 연간평가와 양적평가를 배제한다는 방침이다. 이주형 서울대 인문대학 교무부학장(고고미술사학과)은 “저술평가도 분야마다 특성을 고려해야한다. 논문이건 저술이건 결국 중요한 것은 양적평가가 아닌 학술적 가치판단”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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