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5:15 (월)
말뿐인 전문성 강화 … “학문단장은 지원단장 지원하는 ‘들러리’였다”
말뿐인 전문성 강화 … “학문단장은 지원단장 지원하는 ‘들러리’였다”
  • 박수선 기자
  • 승인 2010.07.19 1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본부 학문단장 집단사퇴 내막은

“학문단장은 인문사회연구지원단장을 지원하는 부수적인 역할이었다”,“사회과학분야 업무를 맡는 사회과학단장이었지만 사회과학발전방안(SSK) 기획단계에서부터 철저히 배제됐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 학문단장들이 털어놓은 학문단장은 이런 자리였다. 한국연구재단은 지난해 6월 출범하면서 PM 권한 강화와 전문성 확대를 첫 번째로 내세웠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주요한 사업은 단장들도 모른 채 진행됐고, 의견을 제출해도 무시되기 일쑤였다. 급기야 단장 5명이 집단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에 속한 어문학, 역사철학, 사회과학, 법정상경, 문화융복합 단장 5명은 지난 5월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김문조 인문사회연구본부 본부장의 직무수행에 항의하는 뜻이었다. 사직서 제출과 반려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지난 6일까지 5명의 사직서는 모두 수리됐다. 곧이어 김 본부장도 “학문단장의 사퇴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했다.

출범 1년을 넘긴 한국연구재단이 연이은 내외부 악재에 흔들리고 있다.  사진은 한국연구재단 전경.
사진 제공  한국연구재단 정책홍보실


그동안 한국연구재단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연구재단은 지난해 6월 출범 당시 본부장과 단장 등 연구사업관리전문가(PM)의 권한과 자격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전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사업관리제도 운영규정에 따르면 단장의 주요 업무는 △각 사업의 기획·관리 △연구 동향과 전망에 대한 조사 분석 △평가방법의 개발과 개선 △사업 심사평가자 선정과 평가 및 과제 선정 등이다.

학문단장들이 실제 맡은 업무는 규정에 명시한 업무와 거리가 멀었다. 단장들은 ‘할 일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임영호 전 사회과학단장(부산대 신문방송학과)은 “전문위원(Review Board, RP)이 각 사업 심사위원을 3배수로 추천하면 확정해주는 일밖에 없었다”며 “기획 제안을 하더라도 사업에 반영 안 해도 그만이었고, 회의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듣는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학문분야와 관련된 주요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몰랐다. 올해 인문사회분야에서 새롭게 시작한 사회과학발전방안(SSK)사업도 관련 분야 단장인 법정상경단장과 사회과학단장은 기획단계에서부터 배제됐다. 인문한국(HK)사업도 마찬가지였다. 강영안 전 역사철학단장(서강대 철학과)은 “HK사업에서 심사위원 추천과 그 평가자료를 인문사회지원단에 넘기는 역할만 했다”면서 “이후 종합심사에 참여했지만 그 전까지 심사결과와 진행과정은 전혀 모른 채 심사하게 됐다”고 전했다.

모든 사업은 학문단장 대신 인문사회연구지원단장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인문사회지원단장은 한국연구재단 간부 직원이 맡고 있다. 학문단장들 입에서는 ‘본부장과 지원단장이 학문단장들을 조직적으로 따돌린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강 전 단장은 “협조결재는 학문단장들이 반대하더라도 그대로 추진됐고, 결재라인에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주장했다. 올해 HK사업 최종심사에서 사업목적과 적합성, 과제의 타당성 검토 및 선정기준 결정을 검토하도록 한 내용도 단장들이 반대했지만 그대로 확정됐다. 이에 대해 김문조 전 인문사회본부장(고려대 사회학과)은 “본부장과 학문단장은 각각의 역할이 있다”면서 “정례회의를 통해서 모든 사업은 같이 논의했다”라고 말했다.

학문단장의 역할 논란과 갈등은 무엇 때문일까. 강 전 단장은 한국연구재단의 독립성이 아직 확보되지 못한 점을 들었다. 행정 효율성이라는 명분으로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의 개입이 이전보다 심해졌다는 지적이다. “독립성과 자율성이 가장 중요한데, 아직까지 교과부에서 연구재단을 통제하려는 분위기가 있다”며 “교과부도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문단장 보다는 지원단장과 일을 추진하는 게 쉽고 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과부 관계자는 “교수들이 PM을 맡으면 전문성 강화라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 학계 이견을 조정하는 능력과 업무관리 능력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연구재단의 독립적인 운영을 강조하는 학문단장들과 사업을 위탁하는 교과부의 입장 차이는 1년 동안 좁혀지지 못했다.

또 예산이 학문 분야가 아닌 사업별로 배분되는 문제도 학문단장의 역할을 축소한 한 요인이었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실제 운영을 하다보면 정부와의 관계나 사업 집행과 사업의 지속성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며 “학문단장은 2년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분들이고 예산이 학문분야가 아니라 사업으로 배정되기 때문에 지원조직이 필요했다”라고 말했다.

한국연구재단이 출범 한지 1년이 갓 지난 시점에 불거진 단장들의 집단사퇴 문제로 연구재단측과 교과부는 난처한 표정이다.  교과부는 애초 PM의 임기가 끝나는 2011년도에 PM제도를 개선할 계획이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시기를 앞당겼다. 이 달 말 열리는 이사회에서 안건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본부장과 단장의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PM 협의체를 의무화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교과부 관계자는 “현재 교수 중심으로 마련한 PM 자격기준을 내부직원도 참여 가능하도록 완화하는 등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연구재단은 후임 인문사회 본부장과 학문단장 공모를 비롯해 사태 수습에 서두르고 있다.

한편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와 학술단체협의회는 지난 16일 성명을 내고 “한국연구재단이 공적 연구지원기관의 생명이라고 할 도덕성, 공정성, 투명성을 견지하지 못한 채, 정치적 편향성, 비문주성, 밀실행정의 관행을 노정한 것”이라며 한국연구재단 전면 개편을 촉구했다.

박수선 기자 susun@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