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5:00 (일)
[學而思] 유라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學而思] 유라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 엄구호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소장 러시아학
  • 승인 2010.07.12 15: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라시아라는 말은 무척 익숙하기는 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혼란스럽다. 평소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역시 ‘유라시아 사업단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구체적으로 연구 대상 국가가 어디 입니까’이다. 유라시아는 사전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합친 지역이지만 사실상 진정한 유럽 또는 진정한 아시아가 되고자하는 구소련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현재는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지역이 유라시아인 것이다. 러시아 지배라는 공동의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며, 러시아 중심의 발전 공간 확대를 가리키는 소위 러시아판 유라시아주의를 어느 정도 반영한 이러한 개념 정의는 현실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는 70여 년 간 소련이라는 제국에 의해 지리적으로 단절됐고, 유럽도 아시아도 아니었던 소련 내 각 민족들은 제국의 테두리 속에서 그것의 문화적 교육과 영향을 자국의 민족적 정체성과 결합하는 독특한 역사적 시간을 살아왔다. 그러나 소련의 멸망은 이들에게 새로운 국가와 국민 정체성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유라시아의 지역적 범주는 매우 가변적이며 언젠가는 유럽과 아시아에 융해돼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진정한 의미의 유라시아로 변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 연구 대상으로서 유라시아의 범주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우며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이 지역은 과거 소련이라는 ‘대지역’의 정체성과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긴 하나 아직은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중지역’이며,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새로운 경쟁으로 부딪히고 있는 지정학적 ‘주변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라시아’라는 용어는 1883년 오스트리아의 지질학자 쥬스(E. Suess)가 유럽과 아시아를 포함하는 지구상의 가장 큰 대륙을 지칭하기 위해 창안한 개념이다. 러시아어에는 역사지리학자 라만스끼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됐고, 유라시아주의에서는 소위 ‘발전장’이라는 개념에 기초해 러시아의 역사적 문화적 고유성, 독특한 길을 설명하기 위해 사비쯔끼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안됐다. 부연하자면 이 용어는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대륙으로 이뤄진 하나의 공간을 염두에 둔 용어지만, 이미 상당히 오랫동안 이 공간의 한 부분인 헝가리의 까르빠뜨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거대한 대평원, 즉 ‘러시아 땅’을 일컫는 말로 사용돼왔다. 그리고 오늘날 ‘유라시아’라는 개념은 지리학적 맥락을 넘어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차원에서 응용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유라시아’는 좁게는 동유럽과 러시아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카프카스, 중앙아시아만을 지칭하는 개념이자, 넓게는 구소연방의 구성공화국(CIS 및 발트연안 3국), 중-동유럽, 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들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 개념이었다. 또한 이들 지역을 구분하는 뚜렷한 기준의 부재와 유라시아 개념 자체의 유동성 때문에 최근의 지역연구에서는 이 지역을 ‘포스트소비에트 공간’ 혹은 ‘포스트공산주의 사회’등 정치체제 전환의 맥락에서 명칭을 정하기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은 전환기라는 현재의 상황을 명확히 드러내고 이들 지역을 아우르는 공통의 특성으로서의 소비에트의 유산을 지적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적 협소함과 시각의 경직성을 보여주는 개념임과 아울러 과거 소비에트 중심적 시각을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를 대체하는 용어인 유라시아는 아직 명확한 범주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러시아를 제외한 중앙아시아와 남카프카스 그리고 위구르·신장 지역과 몽골 지역을 포함해 중앙 유라시아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최근 러시아에서 대두되는 유라시아주의 운동에서의 유라시아 개념은, 그것이 비록 표면적으로 다양한 민족의 공존과 상생을 위한 이념을 설파함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유라시아주의자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지리·역사·사회·문화의 전일적 공간의 재건에서 러시아 중심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포스트소비에트 개별 국가들의 지정학적 경계와 민족적·국가적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역사적,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의미를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타당한 유라시아의 범주에는 우선 과거 소련의 영향권 국가 중에서 EU에 가입한 중동구 국가들과 종교와 민족의 상이성이 너무 큰 발틱 3국을 제외한 12개 과거 구소련 공화국을 포함하는 지역이 포함돼야 할 것이다. 최근 가속화 되고 있는 소지역화 현상을 고려해 유라시아는 가장 중심국인 러시아와 슬라브 민족이 중심이 되는 우크라이나 그리고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되는 남카프카스,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등으로 구성될 것이다. 여기에 중앙아시아와 민족과 역사적으로 깊은 연계를 갖고 있는 몽골과 위구르·신장의 동투르키스탄 지역도 포함돼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터키와 이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등으로도 자연스럽게 확대될 것이다.

엄구호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소장
필자는 러시아 모스크바대에서 박사를 했다. 논문으로는 「유라시아의 민주주의」, 저서로는 『러시아 금융산업집단의 정치경제학적 역할』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