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4:20 (일)
[學而思] 세 가지 우연
[學而思] 세 가지 우연
  • 교수신문
  • 승인 2010.07.05 13:2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생에는 많은 우연한 만남들이 있다. 그 중 어떤 것은 삶의 행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일본 연구자로서 나의 행보도 큰 걸음은 우연한 만남들에 의해 방향지어졌던 것 같다.

우선,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부터가 우연이었다. 학부에서 영어교육,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나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꿨다. 순전히 인간관계 때문이었는데 일본에 대한 지식도, 관심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행을 결정한 이상 스스로 적극적인 의미를 만들어내야 했다. 복잡한 생각을 접고, 딱 두 가지만 마음먹었다. 첫째, 연구 주제는 일본에 관한 것을 한다. 둘째, 주제는 일본에 가서 발견한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사회학이라는 분야 하나는 분명하니까’ 하는 마음으로 일본사회에 부딪치기로 했다. 일본연구자로서의 첫 걸음은 이렇게 떼어졌다.

두 번째 우연은 1991년 초 정부의 ‘세계화’ 정책이다. 나는 그 해 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새내기 연구자로서 활동을 시작한 터였다. 당시 교육부에서 해외지역연구에 대한 지원이 처음 시작됐는데, 내가 막내로 참여한 연구팀에서 그 연구비를 받아 공동연구를 하게 됐다. 이 연구팀에서 3년간 일본 가와사키시의 지역사회 조직들, 시민운동, 사회교육 등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수행했다. 그것은 내게는 일종의 ‘외도’였다.

나의 학위 논문은 일본의 ‘사회의식론’이라는 학문분야의 형성과 변용의 역사를 다룬 것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나는 향후 자신의 연구 방향을 지식체계, 관념 등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연구로 잡고 있었다. 지역사회와 시민운동에 대한 연구, 그리고 현지를 발로 뛰며 1차 자료를 수집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 현지조사 연구는 내가 지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그런데 공동연구가 종료된 후에도 10년 이상을 단독으로 또는 다른 팀에서 그런 연구를 계속했다. 이것이 일본연구자로서의 두 번째 큰 걸음이었다.

세 번째 우연은 인문한국 사업이다. 뒤늦게 서울대에 몸담게 돼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사회 관련 강의를 하는 한편, 일본연구소 운영에 참여하게 됐다. 서울대에서 일본 관련 교육 거점은 국제대학 해외지역전공에만 작은 규모로 존재했고, 연구거점이 될 일본연구소도 2004년에야 설립됐다. 연구소 운영 책임을 맡게 된 후, 학내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일본연구,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일본연구의 방향은 무엇일지 많은 생각을 했다. 서울대에서 일본연구의 방향을 정립하는 것은 다른 지역연구에 비해 매우 민감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과제로 느껴졌다.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그것은 국가전략에 종속되는 지역연구, 해외진출이나 편협한 국익에 기여하는 지역연구가 아니라, 자율적인 학문적 탐구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사회의 공공성 확대와 인간의 존엄성 확보에 기여하는 실천적 함의를 가진 연구라 생각했고, 여기에 공감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러던 참에 뜻하지 않게 HK사업이 나왔다. 그것은 장기적인 비전 하에 길게 연구 활동을 조직할 수 있고, 정년 포스트의 전임연구자를 확보해 안정된 연구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일본연구소의 방향을 정립하는 데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열심히 준비했고, 두 번째의 도전 끝에 HK연구소로 선정이 됐다. HK사업은 연구를 축으로 하지만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하고, 그 일은 각종 규정·제도의 정비와 인력 관리, 재정 관리 등 엄청나게 많은 업무를 급격히 증대시켰다. 그것은 내게 일본연구자로서 자신의 방향과 길을 설계하고 챙기는 것을 넘어서서, 일본연구의 틀이나 조직적 기반에 대해 생각하고 구체적인 실행 플랜을 짜고 실천을 추동해나가는 역할로 새로운 걸음을 떼도록 했다.

세 가지 우연한 계기에서 모두, 내가 발을 딛은 것은 내가 지향하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고, 다만 주어진 상황 때문에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두 길이 연결되는 것을 느끼게 되고, ‘외도’라 생각했던 길은 ‘본령’으로 삼고자 하는 길을 더 잘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HK사업에 대해서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연구 외적인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에 연구자와 관리자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갈등도 많다. 최근에는 이전처럼 서로 다른 두 길이 만나도록 스스로가 길을 터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희망도 갖게 됐다. 무엇보다 HK사업 덕분에 각 분야의 일본연구자들이 이곳에 모일 수 있었기에,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 숨가쁘게 달려왔고 아직 가쁜 숨을 쉬고 있지만 이번에 2년차 6월을 보내며 연구진이 함께 숨고르기를 시도했다. 사업을 보기보다 함께 걷는 사람들을 보며 걸어가다 보면, 또 한번 ‘외도’와 ‘본령’이 만나는 길을 찾는 시기가 의외로 금방 올 수도 있다.

한영혜 서울대 국제대학원·비교사회학
필자는 일본 쓰쿠바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주요 저서에는 『일본사회개설』등이 있으며, 현재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민희 2010-07-09 20:41:36
안 접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