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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꽃과 휴강
[문화비평] 꽃과 휴강
  • 이옥순 서강대·인도근대사
  • 승인 2010.05.1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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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순 서강대·인도근대사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조지훈 시인의 「낙화」를 읊조리던 어느 해 이 무렵의 봄날에 내 아버지는 낙화처럼 세상에서 떨어졌다. 그날 집에서 점심을 든 아버지는 목욕탕에 들러서 몸을 닦고 이발소를 찾아서 머리를 다듬었다. 그리고는 ‘중국집’에서 요리를 배달시키고 고량주 한 병을 들고 경노당을 방문해 친구들과 술을 드셨다.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는 귀갓길에 本家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넘어지셨다. 여든이 넘은 나이였다. 

오랫동안 고통을 받지 않고 준비한듯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의 죽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저녁에 죽을 수도 있는, 죽음의 돌발적 속성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수를 누리고 안락하게 자다가 죽기를 소망하지만 죽음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중년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젊은이가 고속도로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죽음은 대개 갑자기 찾아온다. 미국에서 사망사고의 약 절반이 집에서 일어나고 그 중 약 60퍼센트가 목욕탕에서 일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가까운 곳에 잘 훈련받은 저격병처럼 숨었다가 갑자기 공격한다.

호의적이지 않은 자연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훨씬 더 가깝다. 인도를 통치한 영국인이 남긴 문학작품과 여행기, 각종 보고서에는 열대지방이 수반하는 돌발적인 질병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죽음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삶이 너무 짧다. 누구나 병에 걸려 죽고, 죽은 그날로 매장됐다. 이별이 하도 갑작스러워서 끔찍한 인상을 받았다.” 인도가 배경인 소설 속의 백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질병에 걸려서 덧없이 세상을 떠난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공녀』에 나오는 사라, 『비밀의 화원』에 나오는 주인공 마리는 부모가 모두 인도에서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서 고아가 된다.

어찌 인도뿐이랴! 죽음은 모든 곳에서 비슷하게 작동한다. 사실 존재하는 것 중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음을 무시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죽음을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고 싶어 한다.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한 뒤에 죽겠다는 심사인 것이다. 너무 빨리 죽는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능력이 아깝다고 느낄 때 죽음은 큰 슬픔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마나 고결하게 사느냐보다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관심을 둔다. 삶의 내용보다는 길이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이다. 오래 살면 운명이 더 좋다고 믿으면서. 허나 인류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으면서 150살을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노아의 방주 이전에 살았다는 구약 속의 유대 족장은 969세를 살았다지만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삶은 아닐 것이다.

오래 산다고 더 많은 일을 하고, 하고픈 일을 다 마무리할 수 있지도 않다. 셰익스피어는 52세에 죽었고, 모차르트는 30대 초반에 죽었으나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보다 오래 살아도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거나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 시간은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은 바로 그때인지도 모른다.

대개의 사람들은 죽음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죽음을 부재로 만든다. 죽음을 말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트는 “세상에서 가장 진기한 일이 매일 주변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데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죽음을 외면하고 짐짓 무시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꽃피는 봄날에 학생들에게 꽃구경을 하라고 휴강을 시작한 건 영원하지 않은 시간을 알리고 싶어서였다. 내년 봄에도 꽃은 흐드러지게 피겠지만 내년에 피는 꽃은 올해의 봄꽃이 아니고, 만약 내년에 꽃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올해에 보는 그 봄꽃은 큰 의미를 가진다면서 나는 학생들을 꽃이 만발한 캠퍼스로 내몰았다. 시간의 엄중함, 시간의 되돌릴 수 없음을 아는 것으로도 역사의 절반은 이해한 셈이라고 덧붙이면서.

휴강에 대한 조건은 없었다. 그저 10분정도 꽃구경을 하라고 했을 뿐. 그래도 일부 학생들은 여의도까지 벚꽃축제를 보러갔고, 일부는 캠퍼스에 있는 꽃나무를 찾아서 짧은 봄을 껴안았다. 새삼 봄꽃을 구경한 학생들의 들쭉날쭉한 소감은 편지의 형태로, 리포트의 모습으로 꽃처럼 날아왔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꽃을 보라고 휴강을 하나?” 어느 해 선배교수가 불호령을 내리면서 10년 간 이어진 ‘꽃을 위한 휴강’은 막 내렸다. 그때부터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책’만 보게 됐고, 그들과 나의 ‘어떤 봄날’은 떠나갔다.

이옥순 서강대·인도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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