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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홍덕률’과 ‘호리우찌’
[딸깍발이] ‘홍덕률’과 ‘호리우찌’
  • 김해동 편집기획위원 / 계명대·환경학부
  • 승인 2010.05.1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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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동 편집기획위원 / 계명대·환경학부
근래 ‘대학=직업훈련소’라는 발상이 빠르게 확산돼 가고 있어 마음이 불편하다. 대학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화제가 되고 있는 대기업 총수의 진두지휘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서울의 C대학처럼 구성원들의 민주적 토론 절차가 경시된 구조조정 방식에는 동의하기가 불편하다. 수년 전에 대기업의 전문경영인이 대학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직접 교육부장관을 맡아 대학을 완전히 바꿔보고 싶다는 뜻을 되풀이 밝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기업에 의한 대학의 수모는 이미 예견되고 있었던 셈이다.

    대기업이 내세우는 돈의 논리에 멍든 것이 어디 대학뿐인가. 전국 방방곡곡에 나붙은 기업하기 좋은 도시라는 슬로건은 사회 각 부문이 지켜온 고유 가치가 대기업이 내세운 돈의 유혹에 자진해 복속돼 가는 과정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의 한 부분에 머물러야할 기업이 도를 넘어서서 사회를 먹여 살리는 전부인 것처럼 과대 포장돼 기업의 이익이 절대시되는 기업사회의 음습한 그림자가 곳곳에서 횡행하는 표징이었던 셈이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가 기업 가치에 잠식되는 것에 수수방관하고 있는데, 이런 사회가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유엔이 제시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사회체제를 위한 전제조건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 다양한 집단들이 사회발전의 논의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있지 않은가. 오늘날과 같이 사회적 변동이 심한 시기일수록 사회구성원들이 공동체적 의식과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부의 분배와 정치 참여의 기회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가치가 더욱 존중돼야 한다. 이런 사회적 연대의식과 공동의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이어야 지속가능하며,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척박한 시기에, 최근 <교수신문>과의 인터뷰(2010년 4월26일자)에서 대구대 홍덕률 총장이 언급한 “대학만큼은 민주주의가 경쟁력이다. 증명해 보이고 싶다”는, 그 한마디는 오랜 목마름 끝에 얻은 감로수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홍덕률 총장의 의지가 반드시 성공해 우리나라 사회와 대학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응원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리더십이 성공하려면 우리 대학인이 진정한 자유인이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마음을 담아, 2차 대전 중에 자유인의 삶을 살아낸 일본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인 호리우찌씨의 글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인간, 그저 먼 바다에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겨 두둥실 유유자적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평생 끊이지 않았다. 왜 이런 상념이 끊이지 않았는지를 당시엔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훗날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세상이 온통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만을 요구했고 주위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거기에 함몰돼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었음을 알았다. 미술을 하는 나 같은 예술가에게조차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기에 오히려 나는 점차 사회에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싶었고 그런 길을 찾아 헤맸다. 사회의 전면에 나서는 일 없이, 주연이 아니라 관객으로 살아가는 길을 가기를 원했다. 나라고 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런 인간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몰아친 일본의 군국주의는 개인의 가치를 국가경쟁력 강화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했다. 개인의 활동은 국력 강화에 도움이 돼야만 가치가 있고, 그렇지 못하면 생존가치 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기업가치 우선에 따른 소외 현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시절에 호리우찌씨는 개인의 가치는 사회적 유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점을 의식하며 살았다고 한다.

김해동 편집기획위원 / 계명대·환경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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