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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교수들이 가장 먼저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어쩌면 교수들이 가장 먼저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 홍성민 동아대· 정치학
  • 승인 2010.05.1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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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551호 ‘학술출판’ 기사를 보고 4

유럽대학의 전통적인 목표는 근대국가의 발전에 필요한 연구와 개발, 그리고 지도급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때 대학에서 가르치는 지식이란 ‘보편적인 것(the universal)’을 지향한다. 그런데 20세기에 미국은 연구와 개발을 분리하고, 지도자의 양성대신 경제적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산학모델을 제시한다. 이때 대학에서 생산하는 지식은 ‘학문적인 것’을 넘어서 ‘군산오락’(military-industrial-entertainment)을 포함하는 것이다. 지식은 사용가치가 더 중요하다. 클라크 케르가 1963년에 발표한 『대학의 사용가치(The Uses of the University>』라는 책이 이러한 사실을 웅변한다.

글쓰기 관행도 다르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자는 언제나 독자의 책읽기와 비평가의 비판을 염두에 둔다. 작가-비평가-독자라는 세 축은 텍스트의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지식인)는 독자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이 대륙전통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20세기 미국사회에서 산학연대가 일반화되면서 지식인의 역할은 당연히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구주제, 글쓰기 형식, 연구방법론 등이 모두 일괄적으로 사전에 결정되며, 연구자는 이 형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엄격한 통제와 사후검열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이 변화하면서 지식이 제국을 운영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등장한다.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레이건 정부는 보수적, 문화적, 금융지배적 세계전략을 구사하는데, 여기에 새로운 개념이 동원된다. 우선 근대화이론이 ‘민주화 이행론’으로 바뀐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기획에 미국의 권력자와 자본가들이 아담 쉐보르스키와 같은 미국의 진보진영의 학자뿐만 아니라, 오도넬, 카로도스, 도밍게와 같은 남미학자들을 대거 포섭했다는 점이다.

과거 종속이론의 대가들을 미국에 불러들여 돈과 명예로 회유를 한 후에 그들 스스로가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에서 남미국가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것은 1980년대 일본의 문부성을 중심으로  한국의 학자들에게 비슷한 전략으로 반복된 바 있다. 이들은 정치발전을 위해서 구조개혁과 지도자의 리더십을 강조하는데, 이렇게 되면 저발전의 책임은 모두 국내정치의 무능력으로 돌려진다. 구조적 마르크시즘을 낡은 것으로 매도하고 스스로가 미국식 구조개혁을 따라오도록 만든 학문제국주의의 성공사례이다. 이때부터 남미는 미국과 FTA를 체결하기 시작했고, 금융, 사법, 대학의 순으로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한바 있다. 

또 학문언어의 색깔도 사뭇 다르다. 구조조정의 지표가 만들어지고, 국가별 비교수치가 매년 발표된다. 계급개념을 기반으로 비판정신을 함양하던 사회철학은 사라지고, 효용성의 관점에서 합리적 선택이론, 게임이론,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신국제정치경제학은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가 발표하는 '자유국가점수', 신용평가등급을 학문의 언어로 둔갑시켜 제 3세계국가에게 순위를 매긴다. 또 출판시장에서는 경영학서적과 성공전략의 신화를 유포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다. 이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한국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교수들의 저작실태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은  공공성은 도외시하고 미국대학에서 실시하는 효율성, 경쟁논리만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미국사회에서 사립대학의 비율이 높지만 사실 내부사정을 들여다보면 공적 운영을 강조하는 사립대학도 많다. 예컨대 하버드대학은 연방정부의 예산에서 40%에 육박하는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학교운영을 유럽의 국립대학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남의 나라의 외양만 보고 구조개혁을 외치니 잘 될 리가 없다. 이처럼 편중된 시각이 한국사회에서 지배적인 담론으로 유통될 수 있는 것은 우리사회의 식민성과 관련된다. 70%를 넘는 사람들이 미국학위 소지자들인데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겠나.

더구나 1990년대 이후에 한국 출판시장을 돌이켜 보라. 아마존의 베스트셀러가 곧 우리의 베스트셀러다. 대학에서는 미국식 경영학과 처세술이 넘쳐난다. 글로벌 인재를 만들자고 ‘국제’라는 수식어를 붙여 만든 학부가 우후죽순 생겨나는데 가르치는 내용을 보면 영어학원 수준을 방불케 한다. 저자가 독자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그렇게 키워진 학생들에게 어떤 창의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도 닌텐도나 아이폰을 만들어 보자고 하지만 그게 인문학 없이 가능할까. 권력과 자본은 효율성으로 대학을 개혁하자고 밀어 붙이는데 여기에 대학이 너무 무기력하다. 어쩌면 대학교수들이 돈 맛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으로 길들여 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홍성민 동아대· 정치학

파리10 대학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 「국제정치문화 연구 방법론 서설」이 있고, 저서로 『문화와 아비투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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