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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개 분야 52만여 용어 정리 … 교육현장 활용할 수 있을까
40개 분야 52만여 용어 정리 … 교육현장 활용할 수 있을까
  • 우주영 기자
  • 승인 2010.05.17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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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8월부터 표준화된 학술전문용어 서비스한다는데

18세기 독일. 철학의 어원인 philosophia를 두고 학자들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고대 그리스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독일 학계의 용어를 자국의 언어로 바꾸자는 운동에서 비롯됐다. philosophia가 그 대상에 올랐다. 결국 수차례의 논의 끝에 ‘철학’은 ‘세계의 지혜’란 뜻의 ‘Weltweisheit’로 바뀐다. 그러나 지금 철학을 뜻하는 독일어는 philosophie다. 세계의 지혜가 과연 어떤 의미의 깎임과 더해짐 없이 philosophia의 의미 영역에 꼭 들어맞는가. 많은 학자들의 의문이 philosophia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놨다.


외국어를 학술 용어로 어떻게 정비 할지는 21세기 한국 학자들에게도 여전한 고민이다. 학술단체총연합회는 2003년부터 당시 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얻어 ‘학술 전문용어 정비 및 표준화’ 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가 올해 8월부터 학술단체총연합회의 웹사이트를 통해 서비스 될 예정이다. 이 사업을 시작한 송희성 서울대 명예교수(물리학)는 학술용어의 난립을 지적한다. “우리나라 학문 1세대는 해방 전 일본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런데 해방 후 용어를 국어로 정리하지 않은 채 일본에서 배운 그대로 사용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학문과 기술의 유입은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외국의 학술 용어를 우리 것으로 소화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받아쓰는 상황이다. 게다가 학문이 발달할수록 학제 간 연구는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사 학문에서 조차 용어가 표준화되지 못하다 보니 학문 간의 의사소통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용 빈도수 높은 단어 90% 이상 정리


학술용어 정비 사업은 이 같은 문제의식이 모아진 결과다. 총 24억의 예산이 출연됐다. 처음 어학, 문학, 물리학, 수학 등 18개 학회가 참여한 데 이어 2007년 40여 학회가 추가로 참여했다. 그 결과 40개 분야에서 총 52만 여개의 용어가 정리됐다. 연구책임을 맡았던 조동성 前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은 “각 학문 분야에서 사용 빈도수가 높은 단어 중 90% 이상 정리됐다”고 성과를 밝혔다.

조동성 회장은 “하나의 단어도 각 학문 분야에서 각기 다른 뜻으로 해석되다 보니 그 수가 스무 개를 넘는 것도 있었다. 단어 하나를 표준화하기 위해 각 학계 내에서도 몇 번씩 회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예컨대 철학의 경우 ‘understanding’을 ‘지성’이라고 할지 ‘오성’이라고 할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지성’으로 하자는 주장에 일반인들이 넓게 쓰는 지성을 사용할 경우 철학 고유의 언어가 훼손된다는 반박이 제기됐다. 결국 두 가지 모두 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용어 통일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일도 지난한 과제였다. 이현주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는 학문 분야마다 용어 정리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일을 언급한다. “자연과학이나 공학 분야는 용어를 표준화하는 것에 비교적 고른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그러나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용어 정비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했다.” 인문학은 다양한 학술용어 사이의 간극에서 학문적 해석의 가능성을 찾는다. 표준화 작업은 자칫 학문의 소통 가능성을 차단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철학분야의 정비위원장을 맡았단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는 학문의 전문화와 보편화를 함께 진행할 것을 당부한다. 이미 학문의 아성을 이룬 학자들이 자신의 학술 용어를 포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학문간, 학자간의 대립을 완화하는 일은 이번 작업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다.

학술용어는 학자들의 연구 안에서 활용될 때 의미가 있다. 의학은 이번 사업 이전부터 학술용어 정비 사업에 앞장서 왔다. 용어를 정비한 후 의사국가고시에 적용한다. 그러나 막상 학자들은 정비된 용어를 연구에 활용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국가고시 용어와 실제 의학 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달라 혼란이 끊이질 않는다.

학술 용어 정립의 성과는 교육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날 것이라 기대된다. 용어의 정립은 학문후속세대 양성과 직결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같은 학문 용어를 두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각기 다른 용어를 사용해왔다. 송희성 교수는 “학자들끼리는 용어에 다소 차이가 있어도 원전을 참고하면 되지만 어린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은 어떻게 교육할 것이냐”고 반문했다. 학술 용어를 정비하는 일은 학문후속세대의 양성뿐 아니라 학문의 성과가 학계를 넘어 사회에 환원되는 발판이 된다.

지속적 관리와 후속작업 필요

사업이 끝난 것은 2009년이지만 남는 과제는 없을까. 표준화되지 못한 용어를 학계 안에서 어떻게 수렴할지와 더불어 변화하는 언어를 어떻게 관리할지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산이 종료되다 보니 후속 작업은 책임을 맡았던 몇몇 학자들의 개별적인 몫으로 남았다. 부경생 한림원 전문용어표준화연구팀장은 학술용어 정비 사업이 일회성에 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조동성 前 회장은 우리 학문 용어를 해외의 다양한 언어로 통일하는 문제를 과제로 남겼다. 현재는 국학분야만이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학문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학술 용어를 외국어로 정리하는 일 역시 늦출 수 없는 일이다.

학술용어엔 학자들의 다양한 사유가 응축돼 있다. 철학과 같은 인문학의 경우, 용어 하나 개념 하나가 논쟁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반면 과학의 경우 용어 통일은 시급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용어 표준화 사업에는 이 같은 복합변수가 존재한다. 학계가 동료 학자들이 일군 표준방안을 어떻게 수용할지 주목된다.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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