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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문학적 정의(Justice)
[문화비평] 문학적 정의(Justice)
  • 정은경 원광대·문예창작학과
  • 승인 2010.05.1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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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3일부터 사흘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린 제1회 AALA(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문학포럼은 여러 면에서 의미있는 행사였다. 우선, 근대 초기 개항지였던 인천의 구도심 지역에서 열린 국제행사라는 점이다. 청, 일 조계지와 일본 은행 건물, 로마네스크 양식의 답동 성당, 차이나타운, 그리고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과 그 가운데 우뚝 솟은 맥아더 장군 동상에 이르기까지, 박물화된 과거 모더니티의 한복판에서 외국인들의 낯설면서도 친숙한 얼굴을 마주하면 한국 근대 초창기의 심란한 활기와 소란이 바다 저 끝 어딘가로부터 달려오는 듯하다.

사흘간 열린 포럼의 주제는 ‘세계문학을 다시 생각한다’이다. 그 취지는 ‘유럽 중심주의를 넘어선 세계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탈중심주의 문학 운동의 행보는 2007년 전주에서 열린 AALF(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 그리고 1970~80년대의 제3세계 문학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연대의 중심에는 서구 보편주의에 대한 의심과 저항적 시선이 들어있는데,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방점이 민족주의에서 세계주의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제3세계 문학론이 서구 문학에 묻힌 민족문학의 주체성과 토착성을 되살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면, AALA는 민족문학의 세계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심 이동은 세계문학 담론과, 좀더 근본적으로는 지구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담론의 실상은 복잡하지만, 대체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과 맞닿아 있는 세계문학론은 국민국가 경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응이다. 그것은 한편, 단일화되는 세계출판시장에 적응하려는 상업주의 논리이면서, 동시에 획일화·대중화되는 문화자본에 대한 저항이다. 자본이라는 보편성과 문학이라는 특수성의 이러한 길항에 대한 논의의 한 끝에는 모레티나 카사노바의 문학 자율성에 기초한 세계체제구상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자본을 배제하고 ‘서사시적 총체성’, ‘모더니티’와 같은 문학 고유의 가치를 표준으로 세계문학 지도를 그린다고 해서 지구화에 내포된 자본의 폭력성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본’이라는 교환가치를 또 다른 보편적 가치로 대체한 것으로, 그 안에서 개별적 문학작품은 또 다시 위계화되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그것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권력으로서의 서구 보편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AALA에 참여한 많은 외국 작가들은 대개 자국의 문학 대가들이 서구 보편성에 반해, 얼마나 그들 민족 고유의 자산에 바탕하고 있는지를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는 그들 문학의 세계성에 대한 강조이면서, 동시에 세계문학 ‘지분’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세계문학’을 재화 분배, 혹은 점유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일종의 ‘정의’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몫을 부여한다”를 뜻하는 정의 개념에는 ‘利의  공평한 분배’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정전 다시쓰기와 비서구 문학의 위상 재고는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를 없애고자 하는 정의감의 소산이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투쟁적 자기 주장’이라는 점에서 정의의 심리적 동력 중 하나인 분개심(resentment)에 바탕하고 있다. 헤럴드 블룸이 해체주의자들에게 “셰익스피어의 명백한 미학적 우월성”을 부인하는 원한학파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원한은 최소한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지만, 그것은 반작용이자 무력감, 자기 방어, 어둠의 힘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행복한 공동체와는 멀다.

그렇다면, 정당한 몫과 공평성에 대한 요청이 부정적 감정이 아닌 다른 적극적 가치에 의해 추동될 수 있을까. 김우창은 막스 셸러의 말을 빌어, 개체와 전체의 조화로운 질서를 지향하는, “모든 것을 그것에 고유한 완성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행위의 편향”으로서의 사랑의 질서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주변부 문학이 ‘탈유럽 중심’이라는 수식을 떼고 세계문학으로 나아가는 길이 있다면, 유럽이 만든 위계질서에 기댄 가름과 이의제기와 선별이 아니라, 그것을 잊어버린 천진한 어린 아이의 축제 같은 것에 있지 않을까. 정의란 ‘강자의 힘’일 뿐이라고 흔히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의는 언제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념이다. 그렇다고 정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괴테가 말하고 모두가 꿈꾸는 ‘모든 국민문학들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세계문학’이란 하나의 이상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 도래하지 않는 그 ‘보편성’의 이념이 없다면, 우리 문학은 어떤 올바름에 기대어 나아갈 수 있겠는가.

정은경 원광대·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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