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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영원한 스태프’의 외도
[學而思] ‘영원한 스태프’의 외도
  • 이대범 강원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0.05.10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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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유신의 음습한 공기가 캠퍼스를 짓누르던 1975년 가을, 나는 한 선배의 꼬드김에 넘어가 연극 동아리를 찾았다. 으레 그렇듯이 신참에게 주어지는 일이라는 게 허드렛일뿐이었다. 참고 견딘 보람이 있어 졸업 공연 때, 드디어 ‘영원한 스태프’였던 내게도 무대에 설 기회가 왔다. 대사 두 마디짜리 배역을 위해 열심히 연습했고, 단 30초 출연을 위해 의상을 준비하고 분장도 했다. 남들처럼 공연이 끝나고 그 차림 그대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눈물도 흘렸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광대가 됐다. 그리고 30여 년 넘게 연극판을 전전한 보람이 있어 교수가 됐다.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강사 생활 오래한 사람치고 자기 전공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룬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강사 시절에는 팍팍한 살림에 도리랍시고 챙길 것은 왜 그리도 많은지. 재야에 남는 한이 있어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는 기개 없이,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모교의 교수 자리를 흘깃거리며, 어쩌다 기회가 오면 소용이 닿을 잡문만도 못한 논문 만들기에 전념하다보면 편수만 늘어날 뿐 학문의 깊이는 늘 그대로이다. 임용만 되면 단박에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했으나, 열여섯 해 동안의 강사 생활을 청산하고 임용된 지 여섯 해가 지난 지금에도 내놓을 변변한 연구 성과가 없으니 참 답답한 노릇이다.

사업단마다 정도 차이는 있겠으나 과제가 선정되고 나면 어느 정도 논공행상이 따르게 마련이다. 연구진 구성 과정에서 신청서 작성을 주도한 교수들이 목에 힘을 주는 것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국책사업이 대학이 양산한 넘쳐나는 고학력 인재들에게 밥자리 나눠주는 구휼사업도 아닌데, 학연ㆍ지연 다 동원해 아젠다 관련성이 적은 사람을 연구 인력으로 떡하니 뽑아 놓으면 사업단 운영은 어려워 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밥상 차려놓으니까 숟가락 들고 덤비는 형국으로, 사업을 이끌고 있는 교수들과의 친분을 내세워 주변을 서성거리며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제자를 들이밀었다가 낭패를 본 동료 교수들의 저주에 가까운 볼멘소리도 일을 어렵게 만든다. 사업단 소속 연구 인력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하며 누구누구는 반드시 잘라야한다고 협박성 지침까지 내린다.

이제 막 2막이 시작되고, 배역도 괜찮고, 제대로 역할을 해볼 참인데 판이 영 말이 아니다. 그러니 할 것이라고는 반역밖에 없다. 욕 듣기를 작정하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법. 아젠다 관련 전문성을 높인다는 구실을 내세워 지나치게 많던 공동연구 인력을 확 줄였다. 다음으로 사업단 교수들 모두에게 내가 재임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원해서 그만두는 것 말고 연구 인력 교체는 없다고 달콤한 엄포를 놓았다. 예상보다 반응은 빠르고 분명했다. 우선 낯가림이 없어졌고, 연구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제 ‘순풍에 돛을 달고!’형국으로 순항하는 일만 남았다.

용어도, 개념도 생소한 ‘인문치료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방법론을 모색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 우리 사업단을 바라보는 시각은 확연하게 대별된다. ‘치료’라는 용어 때문에 경계하는 시선과 인문학을 통한 사회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평가하는 긍정적인 시각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공통적으로 인문치료의 임상 경험 부재를 제기하나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어차피 인간의 삶 자체가 임상의 과정이고 인문학은 유구한 임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명확하고 자명한 귀납적인 결론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업단 연구진은 인문치료를 ‘인문학적 정신과 방법으로 마음의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해 인문학 각 분야 및 연계 학문들의 치료적 내용과 기능을 학제적으로 새롭게 통합해 사람들의 정신적ㆍ정서적ㆍ신체적 문제들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이론적ㆍ실천적 활동’으로 정의내린 바 있다. 나는 ‘학제적’과 ‘실천적 활동’에 방점을 찍고 싶다. 주제 넘는 기대겠으나 우리 사업단의 노력이 의미 있는 결실을 맺어, 인문학이 자폐적인 풍토에서 벗어나 사회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소망해본다. 이 외도를 통해 나 또한 실패한 학자라는 열패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대범 강원대·국어국문학과
필자는 강원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민병휘 연극비평 연구」가 있으며, 저서로는 『스토리텔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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