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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커피와 홍차의 전쟁
[딸깍발이] 커피와 홍차의 전쟁
  • 여건종 편집기획위원 / 숙명여대·영문학
  • 승인 2010.05.0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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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건종 편집기획위원 / 숙명여대·영문학
 오후에 모여서 한가하게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모임이라는 뜻의 ‘티 파티’가 미국의 정치권에서 관심의 초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역사와 정치에 지식이 있는 사람은 티 파티 운동에서 보스턴 티 파티를 떠올릴 것이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영국 정부의 세금에 항의하기 위해 보스턴 시민들이 홍차를 바다에 던진 이 사건은 미국 독립전쟁의 발단이 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이 모임의 이름을 붙인 사람들은 티 파티 운동의 의의를 미국의 건국이념에서 찾는다.

    티 파티 운동이 주류 언론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텃밭이던 매사추세츠 주의 상원의원 보궐 선거에서 공화당의 스콧 브라운이 티 파티 조직의 지원을 받아 당선되면서이다.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힘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티 파티 운동의 적극적 참여자들은 대체로 중상류층 이상의 백인, 보수층, 개신교, 고학력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매우 보수적’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오바마 정부에 대해 극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오바마 정부에 대해 가장 빈번하게 쓰는 수식어는 ‘반헌법적 (unconstitutional)’이라는 단어이다. 오바마가 미국의 건국정신이자 헌법의 기초인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과도한 국가 개입으로 미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고 말한다.

    티파티어들은 모두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믿고 있는 자유와 민주의 실체가 무엇인가이다. 이 때 자유는 개인의 자유, 더 정확하게는 소유의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를 의미하고, 민주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정부는 가장 작을 때 가장 좋다”는 믿음, “시장은 옳고 정부는 무능하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돼 있다. 그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작은 정부, 자유로운 시장, 책임 있는 재정정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세금이라는 가장 첨예한 이해관계에 자유라는 이념적 가치가 결합돼 있는 것이다.

    티 파티 운동은 오늘날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가 어떻게 이념적 가치로 변화하게 되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작동한다. 개인의 권리와 책임, 사적 영역의 자율성, 자유 경쟁의 효율성과 윤리성, 사적 이익 추구의 정당성 등은 우리 시대의 자유의 이상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 요소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 보편적이고 소중한 가치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가치들이 맹목적 이념으로 추구될 때 일방적으로 다른 가치들을 배제하고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연중에 배제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의 삶이 존중되지 않으면 내 삶도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이다. 오늘의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이 실존적 조건에서 요구되는 대부분의 가치들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거나, 비효율적이거나 비윤리적인 것으로 폐기된다.

    자유라는 말에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 모순과 혼란이 집약돼 있다. 우리 시대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민주적 가치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어휘가 되기도 한다. 공공영역의 실종, 사영역화, 중산층의 붕괴, 불안정 고용의 제도화, 권력과 소유의 집중, 그 결과물인 양극화― 이 모든 징후들이 우리시대의 지배적 가치로서의 자유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때마침 최근 뉴스위크지는 커피 파티의 등장을 소개하고 있다. 커피 파티는 한인 2세 다큐 감독인 애너벨 박의 주도로 시작된 운동으로 이름이 시사해 주듯이 티파티 운동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시작된 시민운동이다. 한 참여자는 미국이 다시 과두 사회로 가고 있으며, 자본에 지배되고 있으며, 중산층이 파괴되고 있고, 여기에 개입하기 위해 커피 파티를 조직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진 미국의 현실에 대한 판단과 이념적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커피와 홍차의 전쟁은 오늘의 세계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또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가 시작되는 전초기지가 되고 있다.

여건종 편집기획위원 / 숙명여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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