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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비전·원칙 있나 … 기초학문 교육과 연구 확고해야
철학·비전·원칙 있나 … 기초학문 교육과 연구 확고해야
  • 원광연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장
  • 승인 2010.04.26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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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과 구조조정을 보고

요즘 스마트폰의 물결이 거세다. 필자도 사회 변화를 선도하지는 못할망정 뒤쳐질 수는 없기에 사용하던 핸드폰의 약정기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마음 먹고 아이폰으로 바꿨다. 이걸로 인해 내 인생 철학이나 가치관이 변하지는 않았으나 생활 패턴이 꽤나 바뀌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앱스토어를 뒤지다가 재미있는 앱을 하나 발견하고 아이폰에 다운 받았다. 몇 가지 설문에 답하면 그 사람의 사회적 성향을 분석해 준다. 일반적으로 대학 교수는 진보적인 사고 체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현실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범주에 든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내가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진보적이지도 않은 중도 보수적인 범주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뢰도가 높은지는 의문의 여지는 있으나 내가 매우 개혁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존의 틀에 안주하는 타입도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는 이유는 다음에 전개되는 견해가 양극단은 아닐 확률이 높다는 자기방어를 미리 해놓고 싶어서이다.

일본 대학들을 방문할 때마다 놀라곤 한다. 기상천외한 명칭을 가진 학과가 수시로 생겨났다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심해생물학과, 디지털미디어학과, 가상현실학과 등은 무엇을 하는 학과인지 어렴풋이 짐작이나 할 수 있는데 미래공학과, 인조생명체학과, 브레인미디어학과 같은 것은 내 상상력을 뛰어 넘는다. 일본 사회, 특히 대학들이 대단히 보수적인 집단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새로운 학과를 만들고 기존의 학제를 개편하는 데는 비교적 진취적인 것 같다. 필자도 카이스트에 문화기술대학원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터라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새로운 학사 조직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물며 대학 전체의 학사 체계를 재편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우랴!

최근 일부 대학에서 학사 조직을 전면 개편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유사한 일이 있어 왔다. 어떤 때는 대학이 자발적으로 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BK21사업이나 WCU와 같이 외부에서 채찍과 당근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동기와 배경을 불문하고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는데 대학도 이에 맞추어, 아니 오히려 변화를 예견하고 선도하기 위해 대학 자신도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이에 필자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 뚜렷한 철학과 비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시대적 당위성, 학교의 비전, 발전전략, 그리고 학사조직 개편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둘째, 확실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상황 논리보다는 학문적 차원에서 원칙을 수립하고 이에 맞춰 진행되어야 한다. 셋째, 구성원들 간에 충분한 커뮤니케이션과 논의를 거쳐야 한다. 공감대가 형성되면 더욱 좋겠지만 대학이라는 조직의 특성상 이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방적인 밀어 붙이기는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올 수 있다. 넷째, 학생들과 졸업생들의 혼란과 피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필자도 대학 시절에 다니던 학과가 없어지고 통합한 학과에서도 버림받아 뿌리가 없어진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출신 대학에 기여할 채널조차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초 분야의 교육과 연구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기초 분야라고 해서 인문사회와 자연과학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사회와 자연과학에도 기초 분야가 있고 응용 분야가 있다. 마찬가지로 첨단 과학에도 기초 분야가 있고 응용 분야가 있다. 필자의 전공 분야인 전산학에도 알고리즘이나 계산수학과 같이 기초 분야가 있고, 요즘 유행하는 모바일 컴퓨팅이나 임베디드 시스템과 같은 응용 분야가 있다. 세태에 허겁지겁 따라가면서 기초 분야를 등한시 했다가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사례에서 보듯이 기초 분야는 대학에서 해야 하고, 대학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는 융복합의 시대이다. 한 분야의 지식과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융복합을 실현하는 데는 커다란 전제조건이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없듯이 융복합 대상인 개개의 분야의 수월성이 확보돼야 이들 융복합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학문도 마찬가지고 학과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처음 전산학과를 개설할 때의 일이다. 컴퓨터를 연구하는 학과가 필요하다면 냉장고학과, 세탁기학과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볼멘 목소리도 있었다. 물리학과의 역사, 심지어 영문학과의 역사도 채 300년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경우만 보더라도 현재 단과대학의 숫자가 20개를 넘지만 그동안 10개 가량의 단과대학이 없어졌거나 해체와 분리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현 시점에서 Just-in-time 중심의 시스템이 아니라 미래 시점에서 Just-in-case를 구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 이 핵심에는 기초 분야의 교육과 연구가 있다. 이들 기초 분야들이 자생적으로, 효율적으로 융복합을 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것이 변화의 핵심일 것이다.

원광연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장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인공지능 분야로 박사를 했다. 하버드대 연구원, 펜실바니아대 조교수, 카이스트 전산학과를 거쳐 문화기술대학원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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