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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塔身에서 塔心으로
[學而思] 塔身에서 塔心으로
  • 이강래 전남대·한국고대사
  • 승인 2010.04.1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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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즈음 다소 다급하다. 첫 논문을 한국고대사에서 마련한 지 이미 25년이 지난 뒤에 각성한 모종의 단서 탓이다.

본디 과거의 문헌에 기댄 역사 연구에 대한 텍스트의 규정성은 견고하다. 기록된 정보는 창공에 넘실대는 풍선을 잡아맨 지상의 말뚝과도 같은 것이다. 이 경우 끈 떨어진 풍선은 시공간의 좌표를 잃고 만다. 이 그럴듯한 비유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여일하게  유의하다. 당연히, 사료를 엄정하게 음미하는 것은 역사 연구자의 미덕이다. ‘사료의 진의’는 독립적이며, 그러므로 독자의 해석에 우선해야 마땅했다. 사료가 그렇다 한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라는 공세적 질문은 - 80년대 역사 연구자들이라면 누구라도 피하지 못했던 질문이다 - 왜곡된 현실이 강요한 ‘의미의 과잉’에 길들여진 자포적 무례함이라고 여겨 뒀다. 내 나름대로 의연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 후 나의 더듬이는 점차 ‘기록자의 진의’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기록자가 그렇게 기록한 데는 ‘당대적 진실’로서 고유한 현실의 맥락이 있지 않은가. 작품과 작가가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평범한 동의는 역사가의 삶과 사유 역시 그의 현실 조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데까지 확장돼야 옳지 않은가. 그렇다면 연구자가 조우하는 기록물의 당착과 부실의 책임은, 사료는 물론 사가의 몫도 아니다. 더구나 아득하고 장구한 고대의 폭과 깊이에 비해 관련 정보들이란 거의 驛舍 귀퉁이 진열대의 ‘유실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유실물들을 수습한 당대인들의 문법과 사유 자체이다. 오랫동안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썼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또 하나의 징검돌에 불과하다.

    도대체 ‘유실물’의 본질이 오직 진열의 문법만일 리 없다. 그들 하나하나를 경험하고 향유하고 마침내 유실하고 만 주인에게서, 비로소 유실물들은 구체성을 획득한다. 우리는 과거의 기록물을 해석하고 설명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 가운데 유력한 설명은 역사적 표상이 된다. 표상이 풍선이라면 정보는 지상의 말뚝이고, 둘을 매개하는 것은 연구자의 설명 방식일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유실물이 당대인의 문법을 매개로 텍스트에 정돈된 것과 동일하다. 부유하는 개개 유실물을 다시 설명 혹은 표상의 지위에 둔다면, 그것을 규정하는 저층의 경험주체와 그들의 기억 방식을 발견해 마땅하다. 미처 분별되지 않은 채 밑바닥에 잠복돼 있는 그것을 나는 ‘감성의 영역’이라고 부르고 이해한다.

 먼 길을 우회한 것인가, 아니면 짚어야 할 징검돌이 애초부터 그렇게 놓여 있었던 것인가, 나는 아직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다소 다급해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동학들은 ‘한국의 감성 체계’를 표방한 인문한국 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내게 “저 ‘이성’조차 광막한 터에 어찌 ‘감성’을 궁구하려느냐” 우려하신다. “과연 연구와논문을 어떻게 ‘감성적’으로 쓰고 발표하나 보자” 짐짓 명랑하게 거는 딴지도 다정한 걱정이긴 한가지이다. 그러나 실체로서 ‘감성을 연구’하자는 것이 아님은 물론 ‘감성적 연구’를 하자 함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감성을 오직 이성의 대척점에 세우는 타성에 단연히 반대한다. 만약 설명의 정합성에 주안하고, 합리적 인과 관계를 중시하며, 보편적 논리를 겨냥하는 전통적 담론들을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추상적이기보다는 경험적이고, 분류 너머 종합이요, 분석에 앞서 직관을 경유하려는태도를 일러 ‘감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연구단의 첫 학술대회에서 나는 이렇게 피력했다. “우리가 인문적 응시를 감성에 모으는 것은 이성의 맥동이 종료돼서가 아니요 그 휘광이 남루해져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진단하는 감성이란 근대 이성을 넘어서 있는 무엇, 혹은 의연히 이성을 근저에서 규정하고 있는 심층의 저음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인문 담론의 긴 궤적에 언제나 동참했으되 직접 드러나지 않은 음영이었을 것이며, 이미 드러난 것에 본성을 부여해 왔던 근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향은 보편성, 법칙성, 합리성을 추구해 온 위계적 담론의 전복에 있다. 타자와의 공유를 전제로 하는 설명으로부터 경험 주체 스스로의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리는 것도 하나의 유효한 발단이다. 사월은 대개의 사학과에서 유적 답사를 가는 때다. 우리는 필시 어느 탑 앞에 머물기로 한다. 탑은 기단석과 탱주와 옥개석과 복발과 보륜 따위로 ‘익숙하게’ 분석 해체된다. 익숙한 설명은 ‘塔身’을 맴돌 뿐 ‘塔心’에 다가서지 못한다. 그것은 ‘감성의 영역’에 겹겹이 드리운 차폐물이기 때문이다. 낯선 영역을 감지한 나는 지난 궤적을 반추함에서 다급했고, 앞에 놓인 전도를 가늠하면서 초조한 것이다.

이강래 전남대·한국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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