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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대학은 知의 중심인가
[딸깍발이] 대학은 知의 중심인가
  •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 승인 2010.04.1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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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행하고 있는 아이폰 등 스마트폰을 보면 앞으로 대학이 어떻게 변모해 갈 것이며, 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늠해보게 된다. 전자사전, MP3, PMP, 휴대용게임기, PDA 등 최첨단 산업이 모두 스마트폰에 통합되면서 소멸될 것이고, 더욱이 스마트폰은 모바일 산업 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을 개편할 것이란 전망도 나와 있다.

    대학은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서서,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잡는 생존법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 물론 대학이 모든 첨단을 주도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첨단을 다루는 자(巧者)가 미숙한 자에게 부림을 당한다(拙之奴)는 논리가 있듯 대학은 첨단의 정보ㆍ지식(巧者)을 한 수 높게 전망하며, 느릿하게, 그 중심에 서는 ‘拙’의 노하우를 터득해야 한다. 

    ‘巧者’의 정점은 바로 ‘神’의 영역이다. 인간이 그 비밀을 들춰내 터득한 것이 ‘과학’이었다.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명언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거룩한 명상』(1597)이란 책 속의「이단론에 대해서(De Haeresibus)」에 나온다. 원래는 (신에게서) ‘앎(知)은 그 자체로 힘이다’(Ipsa scientia potestas est)이며, 문맥상 神에 대해서 논한 것이지 ‘인간=만능’이란 식으로 인간 일반에 확대한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知’를 뜻하는 라틴어 ‘스키엔티아(scientia)’가 ‘사이언스(science)’에 접속되기에 인간 차원의 ‘지식=힘’이란 상투적 의미로 확대 해석됐을 것이다. 이러한 scientia→science라는 역사적 흐름처럼, 만일 대학이 ‘지식=힘’이란 권위를 찾고자 한다면 ‘知(scientia)’의 영위 그 자체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고민할 일이다. 

    바야흐로 대학이 산출해내는 정보ㆍ지식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다가 오고 있다.
대학을 벗어나서, 교수에게 기대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충분한 첨단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學緣-學歷에 구애받지 않는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자신들만의 정보ㆍ지식 네트워크 형성으로 충분히 맨 파워를 형성해 갈 수 있다. 더구나 여가와 직업의 구분이 없어지고, 전공이 없이도 취업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대학은 선택사항이 되거나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전통적으로 대학은 ‘교양’ 및 ‘고전’ 교육의 전통을 계승하고, ‘人文-人文主義’의 이념을 지속하고 ‘인간’을 성찰하면서, 지성의 독자적 권위를 지켜왔다. 물론 대학이 가진 ‘지식=힘’이란 자부심은 이런 인문주의적 전통과 별도로 과학ㆍ기술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문명적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학의 역할은 文ㆍ理 양면의 전통과 축적된 문화를 계승하고, 문명의 내일을 부단히 여는 이른바 ‘문화의 통역’과 ‘문명의 소통’이었다.

    로버트 J. 시로프(Robert J. Thierauf)의『비즈니스를 위한 지식경영시스템』(1990)에서는 ‘데이터→정보→지식→지혜→진리’의 위계를 밝히고, 맹목적으로 ‘지식’=‘정보 혹은 데이터’로 착각하는 오류를 지적해준다. 시로프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정보는 ‘전문가의 손을 거쳐’ 지식이 된다. 일관된 틀을 가지며 조직화된 정보는 지식을 만드는 기반이 된다. 정보란 어떤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인 것처럼, 지식이란 기본적으로 정보에 의한 정보 즉 ‘전문가의 판단’이 들어간 것이다. 아울러 시로프는 지혜와 진리가 고정불변이 아닌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흔히 시스템, 패러다임이 변화한다고 하지만 그 근저는 운명이나 초월적인 힘이 아니다. ‘인간’의 창의성과 그에 대한 합의의 과정이다. 더구나 정보는 전문가의 ‘손을 거쳐’ 지식이 된다. 그렇다면 정보ㆍ지식 영위의 ‘중심’을 다시 찾는 데 대학이 새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최근 스마트폰에서 보는 ‘융합과 소통’의 범례는 대학의 ‘지식=힘’이라는 권위를 반성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지금 대학은 과연 知의 중심인가. 대학이 다시 ‘知의 새 판’을 짜고자 한다면 ‘왜’ ‘무엇’이라는 물음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거기서 ‘어떻게’라는 방도도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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