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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헐벗은’ 사람들의 사회
[문화비평] ‘헐벗은’ 사람들의 사회
  • 이옥순 서강대·인도근대사
  • 승인 2010.04.0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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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순 서강대·인도근대사
요즘에는 공개적으로 웃통을 벗고 근육을 자랑하는 드라마 ‘추노’의 대길이 같은 남자들이 많아졌다. 이른바 초콜릿복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그들을 보노라면, 누가 힘이 센지 알아보려고 지나가는 행인의 옷을 벗기는 시합을 벌인 바람과 해에 관한 이솝의 우화가 생각난다. 이제 21세기의 우화는 사람들이 옷을 벗도록 움직이는 힘이 ‘햇빛’이 아니라 ‘돈’이라고 적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性的 매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수입도 훨씬 많다고 한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보다 빠른 지름길이 드러난 셈이다. 성적 매력은 노출의 정도와 무관하지 않으니 ‘옷차림이 전략’이라면서 묵직한 정장으로 남성성을 과시하던 사람들도 이젠 ‘되도록 입지 않는 것’, 타잔이나 헐크처럼 상체를 통해 능력을 보이는 전략을 쓰게 된 것이리라.

사실 옷차림은 전략이다. 1931년 인도-영국의 원탁회의에 참석한, 한때 ‘영국신사’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웃통을 드러내고 허리만 가린 옷을 입고 버킹엄 궁전을 방문했다. 한껏 늘어지고 끌리는 화려한 의복을 걸친 영국 왕 조지 5세는 웃통과 종아리를 드러낸 간디의 옷차림을 무례하다고 불쾌해했다. 궁전을 떠나는 간디에게 몰려든 기자들이 ‘옷차림’에 대해 한 말씀 하라고 하자 간디는 “왕이 내 몫까지 입었잖소?”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간디는 반발거숭이 옷차림으로 화려한 대영제국이라는 의복에 구멍을 낸 셈이었다.
옷차림은 물론 역사적이기도 하다. 100년 전만해도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몸을 가리는 것을 문명이라고 여겼다. 근대문명을 선도한 영국인은 웃통을 드러내는 옷차림을 야만의 표본으로 간주했다. 그들이 가장 사랑한 식민지 인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서구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인도 여성에게 충격을 받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엄숙주의에 젖은 그들은 열대의 인도 여성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쳤고, 기독교로 개종한 낮은 계층의 여성들이 가슴을 가리기 시작했다. 하층여성들이 블라우스라고 부르는 윗저고리를 입자 가슴을 가리던 유일한 계층인 브라만 여성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문제가 정치적인 성격을 띠자 식민당국은 선교사들에게 자제할 것을 당부했고, 그것으로 ‘벗을 것이냐 입을 것이냐’의 갈등은 끝을 맺었다.
1881년 말에는 벵골 지방에서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일부 여성들이 블라우스를 입어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그때까지 가슴을 가리는 것은 성을 파는 여성의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동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여성들은 짧은 저고리 밑으로 가슴을 드러내고 다녔다. 근대문물이 들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졌고, 신여성들은 가슴을 가리는 것이 문명이자 개화라고 여기게 됐다. 옷차림도 서구방식으로 바뀌어갔다. 사진자료를 보면, 20세기 중반에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슴을 열고 아이에게 젖을 먹인 어머니들이 적지 않았으나 요즘에는 심심산골에서도 그런 ‘매너 없는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가슴이 성적 함의만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일부 작가들이 20세기 후반의 인도인을 보고 ‘헐벗은 인간’이라거나 ‘벌거숭이 아이들’이라고 오만한 시선으로 보는 건 기이하다. 사실 인도인은 야만적이거나 가난해서 웃통을 벗는 건 아니다. 반 벌거숭이 차림새는 더운 지방이라는 사실에 못지않게 문화나 관습의 산물이다. 윗사람을 만나면 존경의 표시로 위에 걸친 옷을 벗는 관습이 있는 인도에서 옷이 오염의 매개체라고 여기는 브라만 사제들은 수천년 동안 웃통을 벗고 지내는 문화를 이어왔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인가, 탈근대의 실천인가. 사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몸을 노출하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많아졌다. 짧은 치마로 다리를 더욱 더 드러내고, 목이 깊이 파인 윗도리로 가슴골을 더 보이려고 기를 쓰는 여성들처럼 웃통을 벗어서 자신을 팔려는 남성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섹시하다’는 것이 최고의 찬사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성적인 몸이 돈과 직결되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벗고 벗기려는 문화를 보며 걱정하는 나 같은 서생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이고 반역사적이다.

그럼에도 향을 싼 종이에서 비린내를 맡을 때의 배신감을 선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외모는 출중하나 입만 열면 만화처럼 지렁이와 벌레를 쏟아내는 젊은이들, 『인간동물원』을 쓴 데스몬드 모리스의 분류대로 ‘상업적 섹스’, 즉 직접적인 섹스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기능을 수행하려고 애를 쓰면서 책 읽는 데는 인색한 사람들이 많아진 현실이 안타깝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이 봄날의 캠퍼스에서 소박한 모습으로 고상한 생각을 꿈꾸는 학생들이 늘어나길 기대하는 건 어즈버 꿈이런가.

이옥순 서강대·인도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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