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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 실현하지 못한 근대의 딜레마를 넘어서려면
자유와 평등 실현하지 못한 근대의 딜레마를 넘어서려면
  • ‘권위 없는 권위’를 생각하다
  • 승인 2010.03.2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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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없는 권위’를 생각하다

서구사회는 지난 1960년대를 거치면서 권위를 사회와 조직의 원리로 여기지 않는 소위 탈권위사회로 접어들었다. 반면 우리 사회는 탈권위로 나아가려는 경향과 함께 권위를 여전히 조직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경향이 부딪히고 있다.

권위는 외부적 강제수단의 사용을 사전에 배제하고 자발적 복종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권력(폭력)과 구별된다. 다른 한편 권위는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사이의 위계질서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당사자들의 평등적 질서를 전제하는 설득과 구별된다.

서양의 고대와 중세가 권위에 기초한 질서를 강조했다면, 근대는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기획했다. 이러한 징후는 예컨대 신 이해의 변천에 분명하게 반영돼 나타난다. 근대는 신의 권위를 점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즉 중세의 유신론에서 근대에는 이신론, 범신론, 무신론으로의 경향적 진전이 이뤄졌다. 그리고 공백이 된 신의 자리는 점차 인간, 혹은 이성적 인간이 자리하게 된다.

따라서 근대는 자신의 목적이나 기준을 외부세계나 과거로부터 차용해 오는 시대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규범들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근대에 인간을 주체로 상정하는 이성(Cogito)이 철학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은 어떤 신성이나 절대적 규범들까지도 그 정당성을 입증하는 최종 심판관의 기능을 담당한다. 근대를 주체성의 철학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근대의 과정이 비록 권위로부터 탈피의 과정이었고, 이것이 인간해방의 표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외적 권위(예컨대 신)에서 내적 권위(예컨대 이성, 계몽의 합리성)로의 권위의 이동을 보여줄 뿐 권위자체로부터의 탈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권위는 근본적으로 불평등과 지배구조를 그 특징으로 하는데, 근대의 과정은 이성의 지배라는 내적 지배의 유형을 만들어 냈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부정적 현상들의 원인이 됐다. 예를 들어 체계의 합리성 이름으로 진행된 관료제도는 인간을 관리되는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민주주의의 근대적 표현인 대의민주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지배 엘리트계층을 만들어 낼 뿐이다. 결국 근대는 근대의 이상인 인간 해방과 그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실제로 구현할 수 없는 것으로 끝난다.

따라서 근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없는 권위’, 혹은 ‘권위 없는 권위’가 가능할까에 모아진다. 하버마스에 의해 정초된 의사소통행위이론은 그 한 가능성이다. 근대 주체성의 철학이 독백적-주관주의적 이성에 호소한다면,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상호성을 전제하는 의사소통적 이성에 호소한다. 일상적 의사소통에는 상호이해라는 목적이 내재한다. 물론 우리의 구체적 언어행위가 언제나 그 목적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견이 더 이상 일상적 통로를 통해 해소될 수 없고, 그렇다고 폭력으로 결정돼서는 안 될 때 논증 행위를 수행하는 토의에 진입한다. 이때 토의의 목적은 합의의 산출이며, 토의의 전제는 참여자들의 합의가 어떤 강제나 외적 권위가 아니라 보다 나은 논증의 힘에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의의 조건들이 자율의 원칙과 평등의 원칙을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과 토의에 내재한 이런 이상적 계기에 기초해 ‘참여’나 ‘토의’ 등을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강조할 수 있게 됐다. 하버마스가 대의민주주의를 넘어 심의민주주의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해방의 기획을 추진한 근대가 권위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조직의 원리로 하는 정치체의 예로 제시된다. 

정대성 연세대·철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독일 보쿰대에서 박사를 했다. 「하버마스 철학에서 상호주관성 개념의 의미」등의 논문이 있고 역서로 『청년헤겔의 신학론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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