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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엄숙하고 무거운 자연회귀 … 특유의 매력 어디갔나
너무 엄숙하고 무거운 자연회귀 … 특유의 매력 어디갔나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10.03.02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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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김수자의 어떤 실험

 

현대 예술은 그 태생부터 자유로운 상태, 새로움을 소망했다. 현대예술가는 다른 삶의 영토, 다른 삶 자체, 다른 사유, 다른 가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 왔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고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그러한 삶에 부합하는 새로운 영토를 찾아냈다. 우리는 그들을 ‘보헤미안’이라 부르기도 하고 ‘아방가르드’라 부르기도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따라 ‘노마드’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항상 ‘안주’의 유혹, 홈패인 공간에 갇힐 가능성이 존재한다. 더불어 그렇게 찾아낸 새로움이 단지 진기하고 신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새로운 효과를 창출하는 것에 골몰한다”는 아도르노의 비판도 되새겨볼 일이다.

▲ 「지수화풍」展 전시풍경

‘보따리 작가’로 세계적 반열에
    서명 양식(signature style)이라는 말이 있다. 예술가들이 새로움을 지향하는 가운데 찾아낸 자신만의 새롭고 고유한 양식,영토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게 찾아낸 새로운 양식은 기존의 지배적인 틀을 거스르고 저항하는 무기가 되어 우리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찾아낸 새로운 영토가 존재의 감옥으로 치환되는 현상을 우리는 자주 목도해왔다. 물론 많은 뛰어난 예술가들은 ‘서명 양식’의 틀에 갇히지 않았다. 예컨대 파블로 피카소가 그렇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특정 화풍이나 양식, 조류에 안주하거나 갇히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움을 추구했다. 그는 하나의 서명 양식이 아니라 다수의 (때때로 상충하는) 상이한 서명 양식들을 내놓았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은 피카소를 현대예술가의 바람직한 모델로 간주하며 그를 대가로 칭송한다. 반면 어떤 논자들은 피카소를 변덕스러운 방랑자로 폄훼하기도 한다. 진정한 아방가르드가 되는 길과 표류하는 방랑자가 되는 길 사이에서 예술가는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관객-독자들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한 전시에서 변화를 모색하는 한 작가와 만난다. 김수자의 ‘地水火風 Earth-Water-Fire-Air’展(아틀리에 에르메스, 2월8일~3월28일)이다. 주지하듯 김수자는 ‘보따리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초, 화려한 원색의 이불천 보따리로 대표되는 김수자의 ‘보따리트럭 프로젝트’는 관객과 비평가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고 그녀는 이 작품들과 더불어 이른바 글로벌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랐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업은 ‘천’이라는 2차원의 평면을 단순히 ‘묶는’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3차원의 오브제, 또는 조각이 출현하는 변형의 순간에 대한 주목에서 시작됐다.

 

이렇게 미학적, 형식적 관심에서 시작된 작업은 훗날 삶의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됐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작업을 한국성, 여성성의 문제와 관련해 해석하기도 했다. 이 작가의 널리 알려진 또 다른 대표작은 ‘바늘여인’이다. ‘바늘여인’은 일본 도쿄, 인도 델리, 미국 뉴욕, 이집트 카이로 같은 세계 각지의 도시들에서 작가가 행한 퍼포먼스와 그것을 기록한 영상작업을 지칭한다. 관객은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고 몰려나가는 한복판에서 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작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여기서 작가의 몸은 마치 바늘이 천에 대해 그렇듯 관객과 장소를 연결짓는 일종의 정서적 통로가 된다. 비평가 안소연의 말을 빌자면 이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뒤돌아선 작가의 몸을 통해 그 앞에 마주한 광경을 경험하게 하는 ‘타인의 아바타’로서의 자기소멸이다. 
걷기의 의미, 주관적인 시간성, 장소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이 작품은 훗날 여러 도시로 확대되어 진행됐고 김수자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보따리트럭 프로젝트’, ‘바늘 여인’ 등 지금까지의 김수자 작업은 ‘이동’을 전제로 한다. 그녀의 작업에는 떠난 도시와 도착한 도시에 대한 비교인류학적 관점이 두드러진다. 더불어 ‘보따리’가 갖는 지역적, 또는 한국적 함의보다는 가변성, 이동성의 함의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한 인터뷰에서 김수자는 어디를 가도 내가 있을 곳(home)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바 있다. 왠지 한국에 올 때만 낯설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고국을 낯설게 보기 연습을 너무 오래한 탓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김수자 는 ‘보따리 작가’니 ‘바느질 작가’라는 별칭을 불편해 하는데 그것은 이 별칭들이 대중매체와 상업주의의 포퓰리즘과 무관치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새롭게 전면에 나선 ‘자연’
    그런 의미에서 2000년 ‘김수자: 세상을 엮는 바늘’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로댕갤러리 전시 이후 오랜만에 열린 개인전 ‘지수화풍’에서의 변화는 여러모로 주목을 요한다. 우선 여기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이미지들, 이를테면 화려한 원색의 이불천이나 군중을 바라보는 작가의 뒷모습이 빠져있다. 이렇게 인간의 이미지가 빠진 자리에 자연이 들어선다. 이에 대해 작가 자신은 ‘자연’에 대해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여왔고 ‘자연’을 주제로 작업해왔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열린 국내 개인전에서 익숙한 인간적 이미지를 빼고 자연을 전면으로 내세웠다는 점은 분명 어떤 의미심장한 변화를 반영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다룬 자연은 스페인 화산섬 카나리아 제도와 과테말라의 파카야화산 풍경이다. 거기서 작가는 엠페도클레스처럼, 또는 바슐라르처럼 땅과 물, 불과 공기의 4원소의 관계를 살핀다. 이러한 작업의 근저에는 “물은 불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땅이 불과 물, 공기의 요소를 가지고 있듯 각 원소들은 서로 순환하고 연계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각 원소들의 ‘홀로설 수 없음’, ‘기대어 있음’을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이전 작품과의 연계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따리나 몸을 통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들이 연계를 맺듯 자연의 원소들은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 어쩌면 미술평론가 류병학의 말대로 화산 용암이 돌이 되어 떨어지는 모습에서 욕망의 불덩어리는 결국 식고 ‘모든 인간은 재로 돌아간다’는 무상함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좀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천착하는 일은 구체적인 것들과 역사적인 문제들로부터 유리될 위험을 지니고 있다. 카펫이 발자국 소리와 반사광을 모두 흡수해버리는 어두운 전시공간에서 우리는 땅과 물, 불과 공기의 거대한 상호작용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엄숙하고, 지나치게 무겁다. 그리고 몸이 경험하는 생생한 현실적인 세계보다는 관념적 세계상이 두드러진다.
‘지금, 여기’와 ‘그때 거기’, 인간적 현실과 자연의 근원이라는 테제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현실의 구체적인 난제들과 초월적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고 천착하게 하는 김수자 특유의 ‘서명 양식’이 갖는 매력을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내 비판은 너무 성급한 것일 수 있다. 그저 유병학의 말대로 “달라진 형식에 당황해 하고 남감해하는” 평범한 관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평가 안소연은 “김수자에게 작업의 완성이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이며” 그 순간이 오기까지 “어떤 빛의 방출과 어떤 생명의 진화가 전개될지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표류하는 방랑자가 아니라 소망하는 노마드-예술가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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