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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미녀들의 ‘꽃보다 남자’
[문화비평] 미녀들의 ‘꽃보다 남자’
  • 이옥순 서강대 동아연구소·인도근대사
  • 승인 2009.11.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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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순 서강대 동아연구소·인도근대사

 영화 「마이페어레디」에 나오는 히긴스 교수는 “왜 여성은 남성처럼 될 수 없는가?”라고 노래했으나 오늘날엔 이미 많은 여성이 남성처럼 살아가고 있다. 오랫동안 여성에게 금단의 영역이던 분야에서도 남성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능력과 역동성을 과시하는 여성이 많아진 것이다. “여성은 남성처럼 되려고 하면서 왜 좋은 남성이 되지 않는가?”라고 성공한 여성을 꼬집는 발언이 나올 정도로.

    여성이 남성처럼 되기란 쉽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남성은 여성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라고 미의 기준을 정했고 여성은 거기에 맞게 키워졌다. 남성들과 사회로부터 사랑받고 선택받기 위해서 여성은 “조금도 우습지 않은 남성들의 유머에 배꼽을 잡고 웃어주었고”, 남성이 정의한 미의 개념에 최대한 부합하려고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다. 그리하여 ‘머리는 없고 가슴만 큰’ 여성, 지성보다 미모를 가진 여성이 많은 남성의 이상형이 되고 말았다.

    여성들의 옷차림도 남성이 기준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여성은 바지를 입지 못했다. 패션디자이너인 이브 생 로랑이 바지를 만들었으나 당시 영국은 “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부적절한 옷차림의 여성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정도로 저항이 있었다. 그래서 한참 뒤 영국의 총리가 된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는 정강이를 수술한 직후 단 한 번 바지를 입었을 뿐이었다. 우리나라의 한 여성장관이 바지를 입고 국회에 출석했다가 “국회를 모독했다”고 남자 국회의원들의 심한 비판을 받은 것이 그리멀지 않은 1990년대였다.

    여성의 활동이 확대되고 위상이 높아지면서 여성들의 옷차림에 대한 반란이 시작됐고, 오늘날에는 청바지가 젊은 여성이 입는 옷의 ‘대세’가 됐다. 바지를 입기 시작한 여성은 바지의 최대 장점인 기능성과 활동성을 활용하여 사회적 활동을 가속화했다. 아니,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바지의 착용을 촉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은 모름지기 아름다워야 한다는 고대부터 지속된 신화는 여성의 미를 파는 산업의 발달로 한층 강해졌다.

    여성의 해방은 남성에게 있는 여성성과 여성에게 있는 남성성을 해방하는 것이라는 코리타 켄트의 발언은 옳았다. 여성이 여러 방면에서 해방을 누리는 오늘날에는 여성처럼 되려는 남성도 많아졌다. 하늘하늘한 실크블라우스를 입거나 귀걸이 등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몸매를 멋지게 가꾸려는 남성이 늘어난 것이다. 짧은 치마를 멋지게 차려입은 남성을 볼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덕분에 대학 캠퍼스에서도 슈퍼모델이나 미인대회에 출전할 만큼 뛰어난 외모의 여학생들과 꽃보다 아름다운 남학생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허나 ‘꽃보다 남자’가 되려는 남성은 늘어가지만 히긴스 교수가 노래한 ‘정직하고 공정하며 고상한’ 남성은 줄어간다. “정치에 입문해서 내가 배운 한 가지는 합리적이거나 괜찮은 남성이 없다는 사실이었다”라고 고백한 대처 총리의 발언이 상기되는 순간이 적지 않은 것이다.

    얼마 전에 한 여대생이 어떤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키 작은 남성을 ‘루저(패배자)’라고 말해 큰 이슈가 되면서 많은 남성들의 반발을 산 일이 있었다. 그녀의 싸이월드 홈페이지가 다운될 정도로 후유증이 발생했다. 신데렐라가 오로지 작고 예쁜 발을 가진 덕분에 왕자와 결혼을 하듯이 키가 크다는 사실 하나로 사회적 강자로 용인되는 건 동화의 세계로 퇴행이나 다름없지만, 한 개인이 가진 지성과 능력을 무시하고 외모만 강조하는 풍조는 나날이 강해져간다.

    모두 예쁘고 키가 크고 멋지게 태어날 순 없으니 오늘날과 같은 ‘스펙사회’에서 대학생들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이름으로 이런저런 방식을 써서 외모를 가꾸거나 때로 새로운 모습으로 바꾼다. 결국은 그 덕에 ‘예쁘면 다 용서되는’ 가리고 꾸며진 가면의 사회에서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서구세계에 기원을 둔 미남미녀의 기준은 늘 아류로 남을 수밖에 없는 슬픔을 준다. 눈이 크고 코가 높으며 키가 큰 백인은, 호미 바바의 말대로, 황인종이 아무리 ‘닮아가도 완전히 닮을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외양을 가진 공작은 아름답지만 기러기처럼 높이 날지 못한다. 외모가 아니라 자신이 갈고 닦은 능력으로 인생이라는 게임에 승부를 걸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다. 대학에서도 높이 날고 멀리 보는 새를 장려해야 한다. 미용실이나 옷가게, 성형외과를 기웃거리기보다 실험실이나 도서관에서 최선을 다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도록. 그런 학생들이 살맛나는 세상이 되도록.

이옥순 서강대 동아연구소·인도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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