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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문학자
어떤 인문학자
  • 교수신문
  • 승인 2002.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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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올 봄 이 땅의 의식 있는 인문학도들은 학술진흥재단이 내놓은 2천억 규모의 기초학문지원육성사업 때문에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다. 그동안 연구비에 목말랐던 인문학도로서 축하하고 기뻐할 일이지 우려는 무슨 우려인가. 도대체 단군이래 기초학문에 대해 이처럼 대규모의 지원이 있었던가. 허나 사정을 보면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사업은 대·중·소 규모로 나누어 3~5년의 다년간 연구도 할 수 있고, 연구책임자인 교수는 3백만원 정도의 연구비만 받지만 공동, 또는 선임연구원으로 선정된 박사학위 소지 비전임들은 연구기간 동안 월 1백70만원의 수입이 보장된다. 더구나 수료자와 대학원생, 학부생까지도 연구보조원으로 매달 몇 십만원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엄청난 사업예산을확보해 낸 학술진흥재단 이사장이나 관계 직원들의 노고는 정말 높이 살 만 하다. 그리고 이렇게 라도 학문후속세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노력 또한 눈물겹도록 고맙다. 하지만 책임을 맡는 전임교수에게 돌아오는 몫이 너무 적다고 투덜대는 일부 속없는 교수들의 소리는 귓등으로 흘리더라도 오랜만에 굴러온 복에 들뜬 후배들의 모습을 보는 일도 안쓰럽다.

얼마 전 사업 신청 논의를 위해 열 댓 명이 모인 자리였다. 단방 처방식 사업에 대한 우려도 있었고, 사업결과가 너무 나빠서 인문학자들의 노력 부족이 인문학 황폐화의 주원인으로 밝혀지는 일은 없을지를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침내는 충실한 연구를 통해 인프라를 구축해 냄으로써 사업 종료 후에도 국가 뿐 아니라 기업과 사회 전반으로부터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끌어내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결론을 보았다.

그러면서 이상한 선배 한 분이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남들이 안 하는 짓을 하니 이상하달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선배는 선친의 유산을 매달 조금씩 덜어내고 거기에 자신의 봉급 일부를 보태 시간강사 후배 3명에게 매달 50만원씩 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실을 후배들과 돈도 안 될 고대 그리스 원전을 토론하고 번역하는 공동연구실로 내어놓았고, 방학이면 시골의 초막에서 함께 10여일씩 토론으로 지샌다. 그 뿐인가. 지난 방학에는 그리스 고전 전공자가 그리스를 안 가볼 수 있냐며 뭉텅이 돈을 털어 단체로 그리스를 다녀왔다. 그 결과 나라에서 돈을 들여 했어야 할 한국 최초의 그리스 고전 완역을 뜻맞는 후배 동지들과 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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