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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독서백편의자현’의 유효성
[문화비평] ‘독서백편의자현’의 유효성
  • 김기태 세명대· 미디어창작학
  • 승인 2009.11.0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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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燈火可親의 계절이 무르익고 있다. 이맘때면 독서를 장려하는 경구들이 낙엽 휘날리듯 만발하거니와, 그중 자주 식자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男兒須讀五車書’가 아닐까 싶다.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은행잎을 보면서 책읽기를 생각해본다.

   흔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책을 많이 읽는 것”을 뜻하는 多讀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말인데, 오늘날에 견주어 쓰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은 듯하여 잠시 그 뜻을 새겨 보았다. 이는 “사내대장부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뜻인데, 원래는 莊子가 친구 惠施의 장서를 두고 한 말인 ‘惠施多方其書五車’에서 유래한 것으로, 두보의 시에 다시 등장하면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장자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걸쳐 살았던 인물이다. 당시 중국의 책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책과는 생김새부터가 매우 달랐다. 종이가 널리 쓰이기 전이어서 필사재료로 활용했던 것은 대나무였다. 곧 ‘冊’이라는 글자의 어원이 된 ‘竹簡’이 바로 당시의 책이었던 것이다. 먹의 흡수성을 높이기 위해 殺靑 과정을 거친 대나무 안쪽 표면에 사람이 붓으로 일일이 글을 써서 줄줄이 꿰어 완성된 두루마리 하나를 ‘卷’이라고 했으니, 그 부피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한 수레에 어느 정도의 죽간을 실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큰 수레라고 해도 1백 권을 싣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섯 수레라고 해도 5백 권 남짓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죽간일망정 책으로 엮어 읽을 만한 저서가 어느 정도였을지 알기 어렵지만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독서환경이었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굳이 ‘수독오거서’를 오늘날로 환언한다면 “모름지기 다섯 트럭 분량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뜻인데, 한 트럭에 2천 권씩만 실어도 그 양은 무려 1만 권이다. 그야말로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에 한 권씩 읽어도 3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리는 분량이다. 한마디로 오늘날에는 ‘남아수독오거서’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한편, 다독의 유형 말고도 독서방법으로는 精讀, 速讀, 音讀, 默讀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늦게 등장한 독서방법은 아마도 묵독일 것이다.  소리를 내어 읽는 음독이 글자 단위의 읽기라면 묵독은 문장 단위, 의미 위주의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묵독은 눈으로만 읽기 때문에 글을 읽는 사람의 눈동자 움직임이 빨라지면 글을 읽는 속도도 빨라진다. 또한 생각하며 읽을 수 있어서 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음독보다 묵독이 낫다.

    반면 집단적으로 같은 글을 놓고 학습하는 데에는 묵독보다 음독이 유용하다. 그렇다 보니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음독이 중시됐다.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은 으레 스승이 하는 대로 낭랑하게 따라서 읽는 것부터 했으며, 선비의 방에서는 글을 읽는 소리가 그쳐서는 안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출판기술이 발달하면서 읽을거리가 많아지자 점차 묵독의 중요성이 높아져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묵독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또 다른 전통의 독서법은 이른바 ‘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책이나 글을 백 번 정도 거듭 읽다 보면 그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터넷이 상용화하면서 우리 청소년들 사이에 습관처럼 나타난 현상이 바로 ‘쿼터리즘(Quarterism)’이다. 이는 “한 가지 일에 15분도 몰두하지 못한다”는 뜻에서 인내심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의 사고·행동양식을 일컫는 말이다.

    최근의 청소년들은 자극에는 즉각 반응하지만 금세 관심이 바뀌는 감각적 찰나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순간적 적응력을 요구하는 고속정보통신과 영상매체의 급격한 팽창이 한 가지 일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집중하는 능력을 잃게 하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장시간에 걸친 사고와 인내심을 요구하는 독서행위가 청소년들에게 유용한 것으로 인식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번 읽어서 의미 파악이 제대로 안되면 다시 읽어서 글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뜻을 모른 채 앵무새처럼 주절거리는 나레이션은 음식을 맛도 모른 채 먹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는 많이 읽는 것만 강조하는 ‘남아수독오거서’보다는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뜻에서 ‘독서백편의자현’을 가르치는 독서교육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김기태 세명대· 미디어창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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