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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비극과 희극
[문화비평] 비극과 희극
  • 조영일 문학평론가
  • 승인 2009.11.02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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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 학교에서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인문학강좌가 열린 적이 있다. 전체적으로 누가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내가 들어갔을 때의 연사는 박노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사가 열리는 장소는 120석 규모의 소강당으로 대략 80명 정도가 앉아있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박노자보다는 그 다음 연사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귀로는 강의를 들으면서 눈으로는 팸플릿을 향하고 있었다. 강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며, 강의가 끝난 뒤에는 간단히 질의응답이 오고갔다. 강사와 청중 간에 어떤 소통 같은 것이 느껴져서 왠지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음 연사인 김윤식 교수가 강단으로 등장하려는 순간, 나는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했다. 약 50여명의 청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강당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박노자 강연이 끝났으니 이제 다 들었다는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근대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김윤식’이라는 이름 석 자는 감히 넘어설 수 없는 높은 벽과 같다. 그가 행한 방대한 업적과 그에 못지않지 않은 양의 현장비평은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한국근대문학연구는 그가 개척한 토지에서 농사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가 들어서자 강당은 휑하게 변하고 말았다. 나는 잠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같은 전공자로서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제 김윤식도 겨우 이 정도의 청중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것은 김윤식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김현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서 연사로 나왔더라도 학생들은 가방을 챙겨 나왔을 것이다. 너무나 비극적인 장면이다.

    그의 강연은 최재서와 그의 스승이었던 한 일본인 학자의 관계를 다룬 것이었는데, 뭐랄까 너무나 전문적이고 고답적인 내용이었다. 그의 순서가 끝난 후에는, 한 여성 발표자의 차례가 이어졌다. 소개에 따르면 그녀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여기서 몇 명인가가 더 퇴장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영어로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놀랍다’는 표현을 쓴 것은 당시 그곳에는 단 한 명의 외국인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발표내용 역시 식민지하 조선의 글쓰기 양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영어로 발표한다는 사실이 마치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증거라도 되는 양 결코 유창함을 잃지 않았다. 너무나 희극적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확실히 한국에서 ‘문학의 위상’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추락한지 이미 오래이다. 이는 몇몇 인기작가가 여전히 활동하고 또 외국대학에 한국문학과가 생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한국문학의 대가가 연단에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버릇없이 자리를 떨고 일어난 50여명의 학생들을 붙잡고 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설교해야 할까. 물론 학점을 무기삼아 그렇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그런 식으로 설득(계몽)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김윤식은 일찍이 스스로를 ‘묘지기’에 비유했다. 물론 이는 인문학 전체에 해당되는 비유이기도 한데, 문제는 그가 비평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즉 팔팔하게 살아있는 생선의 회를 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윤식은 그것마저 죽은 것으로서 다루어온 게 사실이다(동시대 비평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나는 바로 이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작품과 작품연구가 현실과 만날 수 있는(또는 영향력을 행할 수 있는) 통로는 어디까지나 ‘비평’이기 때문이다. 즉 오직 ‘비평’만이 ‘연구행위가 가지고 있는 페티시즘’(즉 학술오타쿠)과 ‘창작행위가 가지고 있는 상업주의’(전업작가)에 당대적 현실성(역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김윤식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한국문학 전체가 사실상 ‘비평’을 상실해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자기 영역만을 고수하고, 논쟁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따라서 한국문학이 그 50명의 학생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격리된 ‘연구대상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현실 속 ‘대화상대로서의 비평’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아마 내가 느낀 비극도 희극도 없었을 것이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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