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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歷史와 권력
[딸깍발이] 歷史와 권력
  • 임상우 편집기획위원 / 서강대·사학과
  • 승인 2009.11.0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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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우 편집기획위원 / 서강대·사학과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말한다. 패배자나 약자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기록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과학을 이상으로 하는 근대 역사학은 엄밀한 증거를 토대로 하는 가치중립적 역사서술을 추구해왔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이상이 공유되고 있다. 오늘의 역사학은 정치적 승리자나 사회적 강자의 정당성을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견강부회해 합리화하는 서술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국내외적으로 첨예한 정치적 문제에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려있는 가운데, 교육계 일각에서 세간의 관심이 소홀한 틈을 타서 대단히 우려할 만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어 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중·고교 교육과정에 역사교육의 내용과 형식을 정부 권력이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즉, 검·인정교과서라는 미명아래 현 정부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의 정당성을 역사교과서에 반영하려는 기도이다.

    교육계에서는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을 시대의 추세에 맞도록 개편하기 위해서 ‘제7차 개정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교과서를 준비해 왔고, 초안을 현재 교육평가원이 심의 중에 있어서 내후년부터 이의 실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 정부는 ‘미래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준비 중에 있는 ‘개정교육과정’이 미처 실시도 되기 전에 새 교육과정을 시행하려는 준비에 착수했다.

그 출처의 정당성조차 모호하게 밀실에서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래교육과정’의 시안 중에서 매우 우려되는 것은 역사과목의 수업시간 축소이고 역사과목을 사회과목에 통합하거나 이를 선택과목으로 해 역사교육을 상대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걱정되는 것은 그렇게 왜소화, 상대화 시킨 역사과목의 교과서 서술내용마저 정부가 긴밀히 장악하려는 시도이다. 조짐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개정교육과정’의 교과서 심의에 관련돼 제시된 ‘집필기준’에 이미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이룬 ‘이승만 정권’의 업적을 서술할 때 “긍정적으로 서술할 것”이라는 지침이 대표적이다.

    돌이켜보면 유신정부 이래 우리나라의 ‘국사’교과서는 국정교과서로서 국가가 발행해왔다. 전 세계적으로 역사교과서를 국가가 발행하는 나라가 북한, 쿠바를 포함해 3~4개 밖에 안 된다는 지적을 받게 된 교육당국은 마침내 ‘검인정’이라는 이름으로 복수의 교과서 서술을 허용하게 됐다. 그러나 위와 같은 ‘집필기준’에 어긋나는 교과서는 애당초 심의부터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국가는 계속 역사교과서 서술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그 ‘집필기준’은 현 집권세력 및 사회주도세력의 역사해석을 반영하는 ‘대필지침’에 다름 아니다.

    현 집권세력이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교육과정마저 무산시키는 새로운 교육과정까지 기획하면서, 그 중에서도 역사교과서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근자에 있었던 역사교과서 논쟁을 생각해보면 자명하게 드러난다. 이른 바 ‘보수적’ 성향의 정부 및 지식인들이 이른바 ‘진보적’성향의 역사해석과 서술이 교과서에 반영돼 있는 것을 참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를 장악해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승리를 항구화 하고자 하는 시도는, 구태여 역사학의 과학적, 객관적 이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역사에 대한 반역이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조선왕조가 아니다. 국가가 역사기록과 교육의 마지막 한 줄까지 장악하고, 심지어는 史禍를 일으키면서까지 집권세력의 정당성을 저해할 가능성마저 싹을 자르는 그러한 시대가 아니다. 권력의 정당성은 후세의 역사서술로 평가받는 것이다. 권력이 그 당대에 역사적 정당성을 얻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은 헛수고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그러한 시도까지도 기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상우 편집기획위원 / 서강대·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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