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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전자책에는 포만감이 없다
[문화비평] 전자책에는 포만감이 없다
  • 조환규 부산대·컴퓨터공학
  • 승인 2009.10.2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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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환규 부산대·컴퓨터공학
    전자책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책이 특수목적이 아닌 도서 일반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막연한 복고풍의 정서적 문제가 아니다. 10년 전 실패로 끝난 북토피아의 경험은 전자책이 왜 단순한 전자밥통과 다른 상품인지를 잘 알려주었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촘촘히 박힌 글씨로 대표되는 내용이 있지만 그만큼 중요한 형식도 있다. 시원하고 가독성 높은 폰트와 함께 편집 레이아웃도 좋아야 한다. 표지 역시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다운 표지는 산뜻하게 화장한 여인과 같이 이유 없이 나를 들뜨게 한다. 한편 나는 저자의 얼굴이 책의 표지에 그려진 책은 절대 사지 않는다. 책의 허술함은 책 표지에 오른 저자의 얼굴 크기와 그 사진 속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어설픈 웃음의 양에도 비례한다.

   아마 지금까지 필자가 읽은 책을 전자매체, 예를 들면 DVD에 다 때려 넣는다면, 글쎄, 한 3장정도 될까? 그것은 간편할지는 모르지만 탐탁치 않는 풍경이다. 종이책에는 전자책이 주지 못하는 포만감이 있다. 그 동안 읽은 책을 서재에 쭉 늘어두고 그 여정을 보는 것은 명색이 공부를 한다는 사람들의 중요한 즐거움 중 하나이다. 가끔 놀러오는 지인들이 귀한 책을 좀 빌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요청을 듣는 것도 쏠쏠한 즐거움이다. 두툼한 책을 다 읽고 나서 사라지지 않은 감동을 몇 글자로 메모 한 뒤, 그 것을 책꽂이에 밀어 놓을 때의 쾌감은 대단하다. 또는 다 읽고 나서 “뭐 이따위 거지같은 책이 있어!” 하면서 그 두툼한 책을 바닥에 패대기칠 때는 기묘한 가학적 즐거움이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라고해도 전자책을 바닥에 패대기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법률가들의 서재에 거의 예외 없이 꼽혀있는 두터운 양장본의 시리즈물을 딸랑 3장의 DVD로 대체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그들의 법률적 조언은 좀 무게가 없을 듯하다. 최고급 한우 스테이크를 알루미늄 포일에 깔아두고, 손톱깎이에 달린 조악한 칼로 썰어먹는 것과 최고급 네덜란드 델프산 푸른 접시에 묵직한 BMF 칼로 썰어먹은 것이 다르듯이 좋은 내용의 책에는 그에 걸맞은 표현형(Phenotype)에 제공돼야 할 것이다.

    생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포만감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날아가는데 지금의 기술로는 약 8개월이 걸린다는데 그 영양덩어리로 뭉쳐진 튜브형 음식으로는 살아나기 힘들다고 한다. 영양, 또는 콘텐츠 그 자체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포만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물질이 될 수 있다. 전자책에는 포만감이 없다. 지금까지 구입하고 읽은 책이 쌓여지는 광경을 보는 것은 아이들을 쑥쑥 자라는 것을 보는 것 만큼이나 즐겁고 유쾌한 일이다.

    최근 당국에서는 초중고생용 디지털 교과서를 개발하려고 상당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 교과서는 실패할 것이다. 성공한다면 실패를 감추는 것에는 성공할지 모르겠다. 강의실에 전자기기가 들어오는 것이 강의와 소통에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꾸미는 음모이다. 구상하는 디지털 교과서의 스펙을 보니 정말 가관이다. 그 자리에서 수업진행 감독, 성취도 평가, 기록, 노트필기, 게다가 국가 주요 지식DB와 연계(이 부분에서 필자는 쓰려졌다). 군대 안간 인간들이 탱크 이야기는 더 많이 한다고, 실제 강의를 해본 사람에게 한번 물어봐라. 강의실에,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강사와 학생사이에 전자기기로 또 한 겹의 소통장벽을 쌓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게 불편한 행위인지 책상머리에 앉은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생고생하면 준비한 뒤, 장학사 불러다놓고 폼 재며 하는 연구수업 한번이 아니라, 그것으로 한 학기 수업을 한번 해보자. 학생들은 소리를 지를 것이다. 여기저기서. 선생님, 마우스가 안 돼요, 글자가 깨졌어요, 화면에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업데이트 메시지, 팝업창, 추가로 깔아야 할 그 놈의 ActiveX와 보안경고..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을 것이다. 강사는 강의내용보다 장치물 교육에 혼이 빠질 것이다. 대부분 대학에서 의욕적으로 만든 첨단 강의실을 다시 돌아보라. 아마도 가장 비싼 장치는 결코 사용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당국에서 야심차게 설치한 수억 원대 화상회의 시스템이 대부분 잠자고 있듯이. 대당 150만원씩이나 하는 디지털 교과서용 타블렛 컴퓨터는 누가 사 줄 것인가. 아이들을 무거운 교과서로 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사로서 디지털 교과서라. 어이없는 핑계다. 그것은 교과과정과 교과서를 간결하게 만들면 될 문제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에 관한 것이다. 특히 초중등 수업에서 강사와 학생 사이에 잡다한 전자 기계를 밀어 넣는 것은 이이들에게 겉멋 들린 레드카펫 행진을 조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선생님은 PC방 매니저가 아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고.

조환규 부산대·컴퓨터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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