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8:00 (일)
[대학정론] 인문학과 제나라 말
[대학정론] 인문학과 제나라 말
  • 최봉영 논설위원 /한국항공대·한국학
  • 승인 2009.10.12 14: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봉영 논설위원 /한국항공대·한국학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자들이 스스로 인문학이 죽어간다고 엄살을 떨면서 바깥의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에서 인문학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인문학週間을 만들고, 인문학 지원을 늘리는 동시에 몇몇 학자들에게 석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인문학 석학강좌까지 열어놓으니, 마치 죽어가던 인문학이 되살아나기나 한 것처럼 다시 잠잠해지는 듯하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상한 것은 인문학이 죽고 사는 일이 인문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달려 있음에도, 이들은 그것이 오로지 바깥의 사정에 달려 있는 것처럼 남에게 탓을 돌려왔다. 이러니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이 죽어간다고 야단을 피웠지만, 스스로 어떻게 인문학을 해야 살맛이 나는 인문학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인문학은 생각의 세계를 파고드는 까닭에 언제나 제나라 말에 뿌리를 내려야 잘 자랄 수 있다. 다른 나라말을 빌려서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학이 제나라 말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은 고대의 그리스, 로마, 중국, 인도 등에서 잘 드러난다. 서구인들이 중세를 인문학의 암흑기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제나라 말을 버려둔 상태에서, 고전라틴말로써 범범하게 묻고 따지고 풀어내는 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구인은 근대로 넘어오면서 제나라 말을 바탕으로 생각의 세계를 묻고, 따지고, 풀어서 인문학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르네상스는 고전 인문학을 제 나라말에 뿌리를 내리게 함으로써 새롭게 자라나도록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근대인문학은 한국인이 한국말로써 갈고 닦아온 생각의 세계를 묻고, 따지고,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적었다. 인문학자들이 서구에서 만들어놓은 것을 빌려 쓰는 것으로서 구실을 삼았던 까닭에 개항 이후로 130년이 넘었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있음, 없음, 임, 함, 님, 님자, 싶음, 큼, 어짊, 모짊과 같은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줄곧 有, 無, 存在, 主體, 德, 善, 惡, being, subject, desire, virtue, good, evil 등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한국의 학자들이 제 나라말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1919년에 쓰인 3·1독립선언서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뜻을 굳게 다짐하는 글인데도, 남의 나라말에 기대어 글을 씀으로써, 도무지 뜻이 사무치기 어려운 글이 되고 말았다. 그제나 이제나 한국인 가운데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를 제대로 읽고 풀 수 있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읽을 수조차 없는 글을 써서, 독립을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독립선언서를 한국말로써 짓게 되면, 아무리 한자 낱말을 많이 쓰더라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그것을 문장으로 읽을 수가 없다. 어차피 한국인이 읽을 문장이라면, ‘우리는 이제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고, 우리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한 낱말과 문장을 빌려와서 말하니, 도대체 누가 읽고 누가 독립을 하라는 글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인문학자들이 남에게 빌려온 글을 높이 받들면서, 우리말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매우 오래된 고약한 버릇이다. 이들은 이렇게 하는 것은 밖에서 빌려온 낮선 낱말, 문장, 지식 등을 써서 말을 권력의 도구로 삼으려는 까닭이다. 이들은 입으로 소통을 말하면서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써서, 사람들을 무식한 상태로 몰고 가서 누르고 부리려 한다. 사람들이 이런 식의 인문학을 외면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인문학이 널리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학자들이 남의 말을 빌려와서 누르고 부리는 도구로 삼는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

최봉영 논설위원 /한국항공대·한국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