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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하루키, ‘목에 걸린 가시’
[문화비평] 하루키, ‘목에 걸린 가시’
  • 조영일 문학평론가
  • 승인 2009.09.2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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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일본문학계는 여러 모로 의미가 있는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첫째로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작가들이 대거 몰려 있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 오오카 쇼헤이, 나카지마 아쓰시, 마쓰모토 세이초 등등, 이름만 들어도 풍성한 느낌이 들 정도다. 둘째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외문학상 수상과 신작(『1Q84』)의 엄청난 성공(초판만 40만 부 정도 찍었다고 한다)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 두 번째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의 문학상 수상은 한국문학인들에게 참담한 부러움을 안겨주었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신작은 저작료서는 최고가(10억 정도)를 기록하며 논란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2009년을 되돌아보면, 한국문학이 인구에 회자됐던 것은 이른바 ‘황석영의 변절’(?)을 제외하고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한국문학도 올해 많은 문학가들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100주년을 기념해 10편 가까이 드라마나 영화가 제작된 마쓰모토 세이초의 경우와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100주년은 빈곤한 잔치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가 어딘가에서 말한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국문학의 ‘목에 걸린 가시’이다. 그것은 한국문단의 이중적인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하루키는 몇 년 전 ‘신진문인 의식조사’(<교수신문>, 2006년 9월 25일자)에서 가장 과대평가 받은 외국작가로 뽑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제까지 한국문단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제대로 된 형태로 나온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과대평가됐다’고 했을 때, 과대평가의 주체에 적어도 한국문인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판받고 있는 것은어디까지나 하루키 현상을 뒷받침하는 일반독자들이라 하겠는데, 이것은 확실히 이상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앞의 조사에서 말하는 ‘평가’란 어디까지나 전문가들의 평가를 뜻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사실상 ‘평가 없는 비판’을 한 것이다.  

    최소한의 평가조차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비판만을 앞세우는, 유독 하루키에게만 냉혹한 한국문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런 말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문학 자체에 존재하는 하루키에 대한 ‘위화감’에 어쩌면 한국문학의 본질이 응축돼 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루키가 한국문인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 ‘대중작가’라고 딱지를 붙여 내다버릴 때마다 그가 끈질기게 귀환했다는 데 있다. 물론 이 귀환은 국내 독자들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가 국내에서 많이 팔린다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일본에서만 읽히는 작가였다면, 어쩌면 그들의 뜻대로 됐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하루키 정도 팔리는 외국작가는 한국에 꽤 있다. 그러나 한국문단이 그들에 대해 딱히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대중문학’이라는 딱지 하나를 붙이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독자의 사랑을 듬뿍 받는 다른 일본소설에도 “일본문학은 한국문학보다 건강하지 않다”는 편견을 붙들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조차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신작을 들고 올 때마다 외국(주로 유럽과 미국뿐만 아니라 러시아나 중국 등 동아시아)의 평판을 업고 오는 하루키는 상대하기 싫은 존재이다. 그런 그가 작년에 카프카상을, 올해는 예루살렘상까지 받았다.

    최근 1년 사이에 하루키에 대한 한국문인들의 태도를 보면,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주지하다시피 카프카상이나 예루살렘상은 이제까지 노벨상급 작가들만 받아온 세계적인 문학상이다(실제 이 상들을 타고나서 노벨상을 받은 이가 여럿 있다).

하루키가 이 상들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그가 ‘과대평가’ 운운하며 매도할 수 있는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노벨문학상은 그렇다고 쳐도 카프카상이나 예루살렘상 하나 받지 못한 한국문학판에서 이뤄지는 그에 대한 ‘평가 없는 비판’은, 기껏해야 자기들의 빈곤함을 감추기 위해 애국적 악다구니로 비칠 수밖에 없게 됐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젊은 작가나 비평가들이 뜻밖에도 하루키의 애독자라는 점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에 대해 발언을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앞에서 언급한 조사에서처럼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하루키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하루키에 대한 한국문학의 위화감은 어쩌면 양자간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닮음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평가 없는 비판’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루키에 대한 ‘그런 식의 비판’ 자체가 평가 자체를 회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평가는 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이 하루키 문학의 반복(적자)이라는 진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한국근대문학자체가 일본근대문학의 반복이라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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