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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녹색당 당원 의사부부의 삶
[學而思] 녹색당 당원 의사부부의 삶
  • 최병준 서원대·독어독문학
  • 승인 2009.09.07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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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겨울, 독일 콘스탄츠대학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누가 내 숙소의 문을 두드리기에 열어봤더니, 낯선 이가 찾아와서, 내가 ‘바둑을 둘 줄 안다는 소문을 듣고, 바둑을 두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시간이 나면, 내 숙소나 그의 집에서 바둑을 두었다. 특히 주말에는 종일 그의 집에서 바둑을 두거나 하면서 보냈다. 그는 정신과 의사였으며, 그의 부인도 소아과 개업의였다. 자녀들은 모두 독립해서 부부만 함께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은 호수 가에 한적하고 아담하게 서 있었다. 내가 처음 그의 집에 가던 날, 그는 자기 집 앞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이런 좋은 집에 살고 있는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 집은 결코 크거나 화려한 집이 아니라 작고 소박하고, 평범한 집일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집은 놀라웠다. 그는 절대로 현관문을 잠그지 않는다고 했다. 이 집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들어와서 쉬어갈 수 있도록, 항상 개방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집 반 지하실에는 한국 여학생이 임시로 살고 있었다.

    거실에는 어디서 주어온 듯한, 모양이 각기 다른 의자와 소파가 몇 개 있을 뿐이었고, 벽에는 시계도, 그림도, 다른 어떤 장식품도 없었다. 다만 한쪽 벽면 전부가 책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 흔한 오디오 제품도 TV도 라디오도 없었다. 그의 집에 있는 문명의 이기는 전화기와 자동차와 전기오븐이 전부인 것 같았다. 그의 부인이 내어온 찻잔과 받침 접시는 모두 모양이 달랐고, 즉 제 짝이 아니었고, 모두 금이 갔거나 모서리가 깨진 것이었다. 저녁식사 때에 보니 다른 식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라면 이미 오래 전에 버렸을 물건들이었다.

    처음부터 매우 이상했지만 물어보지 못하다가, 몇 번 만나서 친숙해진 후,  나는 그 동안 너무나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당신들은 부부가 의사이다. 그러면 상당한 고소득자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빈민처럼 사는가?” 그러자 그 의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생존해 가기 위해 필요한 물질이란 아주 조금이면 족하다. 그 밖의 것은 사치이고 낭비일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점점 더 탐욕스러워지고, 바로 그 탐욕을 채우기 위해 한정된 지구자원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다. 지금 나는 이렇게 살아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

금이 간 찻잔이라고 해서 커피 맛이 변하는가. 의자란 앉기에 편하면 족한 것 아닌가. 다만 전화는 병원에서 급한 연락이 오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고, 이곳 스위스는 대중교통망이 좋지 않아서 자동차가 없으면 출퇴근이 너무 어려워서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마저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좋겠다.”

    “그러면 당신들이 버는 돈은 어디에다 쓰는가. 무슨 계획이 있어 따로 저축이라도 하는가.” “우리 부부의 생활비는 아주 조금이면 족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필요한 사람에게 보낸다” 라고 그는 말하더니, 자기가 기금을 보내는 단체의 목록을 보여주었다. 언뜻 보아 20여 개 단체는 될 것 같았다. 무슨 환경단체, 구호기금, 인권단체 등.

이들 부부는 ‘녹색당’ 당원이었다. 나는 이들 부부의 생활에 대단히 감동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이들 부부의 생활을 소개해 왔다(그리고 여기에 또다시 소개한다).

    莊子가 이르기를, “뱁새가 깊은 숲에 둥지를 튼다 해도 나무 가지 하나면 족하고, 쥐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자기 배하나 채우면 그만이다.(巢於深林 不過 一枝, 偃鼠飮河 不過滿腹. 소요편)”고 한다. 억만금의 재산을 가진 부자도 세끼 식사면 하루를 지나기에 족하고, 두어 평 침대 하나면 하루 밤 잠자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은 탐욕을 한없이 키워간다.      

    우리는 지금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고,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을 잠재울 줄 모른다. 또한 우리의 자본주의는 우리 개인들에게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낭비하라고 끊임없이 유혹하고, 강요한다.

    나 역시 그 의사부부의 삶을 흉내조차 내지도 못하고, 자본주의의 속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혹시나 나는 맹목적 소유욕, 소비욕의 노예가 돼 있지는 않은가’ 가끔은 돌아보며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최병준 서원대·독어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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