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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지도교수의 면담시간
[딸깍발이] 지도교수의 면담시간
  • 서장원 편집기획위원 / 고려대·독문학
  • 승인 2009.09.01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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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A사회복지재단이 후원하는 학술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독일에 다녀왔다. 이 재단은 ‘ 광의의 사회복지’와 관련된 연구과제를 대상으로 연구자들을 공모했는데 운이 좋게도 ‘망명과 귀환이주’라는 주제로 선정됐다.

  ‘망명과 귀환이주’는 20세기 한국이 조선왕조몰락, 일제강점, 해방, 분단고착 등 격동과 전환의 역사를 겪으며 자생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망명과 강요된 이주의 역사가 틀림없이 있었겠지만, 아직도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부상하지 않는 학계의 현실을 주시해 여건만 허락되면 언젠가는 한 번 수행해 보려고 마음먹었던 과제였다. 

  이에 관련된 역사적 현실을 조망해 보면, 1910년 한일합병부터 일본의 무단정치가 실시되던 3·1운동 직후까지 망명과 이민은 대규모로 발생했지만, 1945년 이후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이주한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당시 중국에는 약 200여만 명 정도의 한인들이 거주했지만 이들 중에서 약 70여만 명 정도만 독립된 조국으로 귀환이주 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통계다.

  대부분의 망명이민자들은 타의에 의해 망명의 땅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당면했던 문제점들은 고스란히 그들의 2~3세대로 이어졌다. 21세기 초엽인 현재, 그들의 3~4세대가 선조의 조국인 한국으로 귀환이주를 시도한다고 해도 이들이 지닌 문제점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망명이나 이주를 강요받았을 때의 상황과 별 차이가 없다. 더구나 국내의 시각으로 볼 때도 그들에 관한 문제는 간단히 해결 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실상과 문제점은 곧 연구의 급박함을 자극하지만, 이런 방대한 주제를 객관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왜냐하면 망명과 귀환이주에 관한 문제는 특정한 인물들의 개인적인 이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고, 이에 따라 연구의 방향이 자칫 잘못하면 특정한 개인에 대한 일방적인 미화(혹은 폄하)나 지나간 과거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으로 일관될 수 있는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필자는 한국의 역사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고 20세기 독일 사회에서 발생한 ‘망명과 귀환이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20세기 독일의 역사는 ‘한 시대의 몰락(바이마르공화국)과 새로운 정치체제(국가사회주의)의 등장’, ‘흥망과 영욕의 역사’, ‘분단과 재통일’ 등 일련의 시대적 전개상황이 20세기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인 기본 토대를 마련해야 하는 20세기 한국의 시대사나 아직도 첫발을 내딛지 못한 국내의 ‘망명과 귀환이주’ 연구를 위해서도 좋은 암시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A사회복지재단에 제출한 이러한 내용의 대략적인 연구 계획서를 지니고 독일의 지도교수를 방문했다. 필자에게 박사논문을 지도한 교수님은 휴가 중이라 필자가 독일을 떠나기 직전 전화로 연구계획에 대해 논의했고, 대신에 필자에게 처음으로 망명문학 연구의 길을 열어준 70대 후반의 노교수와 면담을 했다.

  그의 사저를 방문 했을 때 책상위에는 5권의 책을 2권 씩 그리고 1권을 차례로 쌓아 놓고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책을 펼쳐가며 자상하고 세밀하게 지도해 주시는 학자적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곧이어 연구의도와 목차 그리고 문제점에 대한 대화가 있었다. 교수님과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내용보다는 내가 준비한 계획서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면담이 끝나고 일어나서 인사를 드리니 정확히 30분이 지났다. 면담을 하지 않고 연구계획을 진행시킬 수도 있었지만 스승의 조언은 무엇보다도 고귀하다는 것을 언제나처럼 느끼며 지도교수님께 작별인사를 고했다. 책이 완성되는 날 교수님의 면담시간에 새로운 비판과 충고를 기대하며.

서장원 편집기획위원 / 고려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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