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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역사의 심연을 잃어버린 도시
[대학정론] 역사의 심연을 잃어버린 도시
  • 박길룡 논설위원 /국민대·건축학
  • 승인 2009.08.31 15: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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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화가 두렵다. 이런 식이라면 현대화가 걱정이다. 우리 도시의 풍경이 그 염려대로 바쁘게 바뀌고 있다. 제3세계의 도시가 모두 그러하듯 전통과 현대성을 대척적으로만 생각하는 양태 때문이다.

    도시의 문화적 역량은 그 도시가 유지하고 있는 역사를 열원으로 한다. 물론 도시의 경제력과 프로그램이 도시문화를 역동시키지만, 역사가 얕아서는 냄비의 외연에서 끓는 형국일 수밖에 없다. 국제화로 휘둘리는 현대도시는 시간을 지우고 어디나 모두 같은 장면을 만든다. 이것이 제2의 국제주의이고, 곧 문화 다양성의 위기이다.

    싱가포르의 경제적 여유와 현대적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도시성이 싱거워 보이는 것은 시간으로부터의 내밀함이 얕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은 너무 깊은 역사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택동 시절 더 굽을 수 없을 만큼 웅크려졌던 삶이 자본의 비를 맞고서는 喊聲과 함께 부풀어진다. 중국은 우리가 80년대 까지 (아니 아직도 여전히) 자본개발이 역사보전의 우위에서 경영함을 답습하는 듯하다.

    이제 중국은 ‘살만한 중산층 인민의 생산’을 위해 주저 없이 보전보다는 개발을 선택한다. 우리가 후회해도 할 수 없게 된 선험을,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가 반복한다. 문화혁명이 한참 역사를 지우더니, 이제는 자본이 역사 지우기에 한창이다. 도시의 일상이던 후통[胡同]이나 四合院은 관광용으로 보존된 일부에서만 관람료를 내고 볼 수 있게 됐다. 후통은 우리 전통 도시의 뒷골목 같은 것이고 청조까지만 해도 피맛골과 같은 성능을 가졌다. 사합원이란 4개의 집채가 가운데 마당을 두고 둘러쳐지는 공간구조로 우리의 도시 한옥과 같다.

    우리의 골목과 한옥이 기를 쓰고 보존해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서울의 북촌을 기억나게 한다. 그러나 지금의 북촌도 일그러지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 너무 늦었구나!’ 하고 있을 때, 중국은 더 열 차게 시간을 부수고 있다. 이제 그들도 곧 역사의 박제를 만드느라고 애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개발자본이 건네는 ‘문화유산 보존’의 약속을 믿지 않게 됐다. 개발자본이 내미는 개발 프로젝트 마다 ‘자연과 전통과 화합’을 노래하지만 ‘거짓말이야’ 하는 백 코러스와 함께 들리는 것은 나만의 환청이 아닐 것이다.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을 대체한 삼성타워의 형편없는 기억력, 종로 피맛골의 흔적이라도 살리마고 약속한 재개발의 헛헛한 제스처, 세운상가를 대체해 남산-종묘의 녹지축을 만든다는 간판의 허구. 서울의 강북은 강남과의 도시 경제에서 상대적으로 뒤처지며 초조해지고, 집안의 족보를 강냉이와 바꾸기 시작했다.

    도시에 있어서 현대화의 목적과 개발의 수단은 하나의 일인데, 그 디자인에서 문제는 ‘크기’와 ‘성질’이다. 개발은 단위 크기가 클수록 이윤이 크기 때문에 자꾸 슈퍼 사이즈 빌딩을 만든다. 그것도 한 통째로 커야 수지가 더 좋다.

그런데 도시의 장소는 클 것과 작은 것이 따로 있다. 사막의 도시에서는 큰 것이 미학이 되지만, 서울 강북의 스케일은 절대로 커서는 아니 된다. 그 장소가 가지고 있던 크기의 맥락이 그렇기 때문이다. 슈퍼 사이즈의 빌딩은 압도적이게 되고 작은 단위 간의 감성을 쓸어버린다. 잘게 나누어 만들거나 최소한 시각적으로 잘게 보이도록 디자인해야 한다. 다음 문제는 어떤 진보적 형국에서도 유지돼야 할 도시의 恒性이다. 서울은 서울성이고, 경주는 신라성이다.
무엇 ‘다음’, 꼭 ‘그러함’같은 존중될 항상성을 지키는 일이다.

    도시 디자인의 경영에서 고유의 성질은 현대화로 희석되고, 시간은 국제성으로 휘둘리는 저 휘황찬란한 도시가 걱정이다.

박길룡 논설위원 /국민대·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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