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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세평]더 신나는 연구실을 꿈꾸며
[신문로세평]더 신나는 연구실을 꿈꾸며
  • 유금호 / 목포대
  • 승인 2002.03.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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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18 17:41:34
유금호 / 목포대·국문학

강의실 복도에서도 직접 강의를 받는 교수가 아니면, 학생들은 요사이 거의 목례를 하지 않는다.

피우던 담배를 뒤로 감추는 시늉을 하는 학생마저 드물다. 그런가하면 졸업이 가까워지는 사은회의 자리에 언제부터인가 교수들도 핑계만 있으면 참석하지 않으려는 궁리를 슬슬 한다.

그 형식적 자리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세상에 나가는 제자들과의 석별 자리, 가르쳤던 제자들이 사회에 나가 직접적으로 도움 될 수 있는 조언에 자신이 없고, 학생들이 전문가로 사회에 곧바로 적응하도록 가르치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물론 따른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깊은 신뢰의 정을 서로 느낀 선생과 제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어 가는 것일까.

한때 시너를 온 몸에 뿌리고 불타고 있던 제자의 모습을 지켜 보아야했던 곤혹스러웠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같이 피가 꿈틀거렸던 울분의 공감된 공간이 있었다. 그 순수한 청춘들의 희생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굴절된 역사가 바로 세워지기를 입술 깨물며 기원했던 때가 교수들에게는 더 긍지의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그때의 학생들에게 무엇인가 개혁해야 할 분명한 대상이 있었다.
미워할 대상이 있었고, 그 대상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단순한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미워해야 할 대상도, 개혁해야 할 상대도 없다. 이제 그들에게는 지극히 현실적 가치관만이 남아 점점 이기적인 외톨이들이 되어 간다.

진리만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젊은 날들, 모든 세태를 외면하고 외길을 걸어왔던 교수라는 직업이 현재의 세태 속에서 때로 외줄 타기의 외로운 광대가 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옛날의 선비들은 정신적 자존심만으로도 묵묵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뀐 것이다. 모든 것이 배금의 잣대로 통용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우선 교수들은 때때로 상대적 빈곤감을 느낀다. 시장논리와 배금적 가치관이 자리잡은 이 시대는 학생들 역시 자기 집 보다 경제적으로 못사는 교수를 마음속으로 비웃는다.

근대화의 과정, 부모들의 보상심리 속에 아이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격심한 경쟁논리와 이기심으로 자라왔고, 그 아이들은 대학생이 된 지금, 대학 역시 그들에게는 출세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짐작하는 교수들이, 그것을 부정할 수도 없는 입장에서, 어떻게 그 형식적인 사은회의 자리에서 모른 척 술잔을 받을 것인가.

이제 학생들은 선생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사회 현실 속에서 훼손되고, 포말처럼 스러지는 것을 안다.

교수들도 그들이 신봉해 왔던 진리라는 것이 현실에서 연봉 얼마인가의 척도 앞에서 때로 무력하게 눈사람처럼 무너지는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가하면 심심찮게 신문의 한 쪽 귀퉁이에는 재임용 탈락교수 이야기가 실린다.

재임용이며, 승진에 필요한 논문이 계량화되면서 숫자에만 집착하는 논문들에 대한 우수수한 소문들도 들린다.

사립학교 집행부에 요새 거친 말로 찍혀서 그렇게 되었다는 피해자의 변명이 곁들이고, 그 부당함을 항의하는 성명서가 교수휴게실에 나뒹굴기도 한다. 그래서 또 우울해지는 것이다.

한때 민주화의 열망 속에 총장 직선제가 받아들여지고, 교수들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동료 중에서 학교 대표를 뽑는 긍지에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모든 선거에는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선거가 있기까지 상당 기간 같은 동료 교수들끼리의 어색한, 또 어정쩡한 탐색과 표 계산들의 시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때 깊이 파인 골은 총장 선거가 끝나고도 한 동안 메워지지 않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오직 연구하고, 가르친다는 외 길 인생이 어느 때는 삐에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교수들에게 언제부터인지 교수 노릇이 영 신통치 않는 것 같은 회의가 온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현재의 사회 현실을 만들어간 것에 우리 교수들의 책임은 없는 것인가.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본업인 우리들이 그 동안 제자들을 잘못 가르쳐 왔던 일부분의 책임이 지금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닌가.

‘結者解止’

어차피 우리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을 수밖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선택한 길. 자신들이 우리들의 자존과 자긍심을 찾고 지키는 길을 모색해야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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