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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志操 높은 개’
[딸깍발이] ‘志操 높은 개’
  •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 승인 2009.06.1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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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야 어떻든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이라는 제목은 우리 언어 습관에선 좀 귀에 거슬린다. 꿈, 청춘, 오후, 얼굴, 인간 등 좋은 말도 ‘개’나 ‘개 같은’이란 말만 붙으면 형편없이 찌그러진다. 세련된 것도 뭔가 질이 떨어지고 野生인 것처럼 들리고, 좋고 값진 것도 헛되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바뀐다. 최근 말끝마다 ‘개’라는 말이 붙는 경향이 있다. ‘열라·졸라·절라·존나’ 같은 비속어가 상용되던 것처럼 말이다. 

    좀 뭣한 얘기지만 최근 우리대학 교수 무기명 대화방이 ‘개(=犬)’방으로 변한 적이 있다. 재단정상화 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전국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 등을 둘러싼 논란 때문이었다.

상반된 의견을 보이는 대목에서는 감정이 격하다 못해 서로를 ‘개’로 몰아세웠다. 어떤 경우는 ‘쥐새끼’, ‘무뇌’, ‘축생’ 등 형편없이 깎아내렸다. ‘개 눈에 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다 한다. 멀쩡한 얼굴로 지성인인척하고 살지만 익명의 게시판에선 戰士들처럼 살벌하다. 한 분이 교수대화방에는 교수도 인간도 아닌 개들이 많이 있는데 ‘개와의 논쟁에서 지면 개만도 못한 놈. 비기면 개 같은 놈. 이기면 개보다 더한 놈’이 되니, 토 달며 논쟁하지 말라는 글을 올려 한참 웃기도 했다.

    金凡父 『風流精神』의 「김유신」항에 보면, 김유신을 감동시킨 天官이란 가객이 부른 노래 가운데 “울지 못한 새가 되고 / 짖지 못한 개가 되어”라는 소절이 소개돼 있다. 윤동주의 시 「또 다른 故鄕」에는 “志操 높은 개는/밤을 세워 어둠을 짖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의 ‘개’는 시대를 지켜내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志士의 속내를 은유하는 것으로 인간을 저질로 험담하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이탁오는 “사람의 욕을 먹는 개야말로 성품이 義로워 집주인을 지켜주고, 집안이 가난해도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개’란 말로 사람을 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거꾸로 ‘사람’이란 말로 개를 욕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과연 사람의 못됨은 형용하기 어렵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가죽을 쓰고도 오히려 개의 머리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오히려 개의 가죽을 뒤집어쓰고도 사람의 머리와 뼈를 갖고 있다고 해야 옳다.
그러니 아직도 사람을 어떻게 욕해야 할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사람을 욕하는데, 사람은 개만도 못하니, 적절한 말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이탁오는 ‘개 같은 사람’이라 하지 말고 ‘사람 같은 개’라고 하는 편이 옳다고 보았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어느 책에서는 정치인과 개의 공통점을 ‘배고프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자고 싶으면 자고,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하는 것이라 했다. 밧줄에 목이 묶인 채 앞의 개가 짖으면 아무 생각 없이 눈 감고도 마구 따라 짖어대는, 그런 속 편한 사람이라면 정말 상팔자=개 팔자가 아닌가. 아무 고뇌 없이 속 편히 사는 개 팔자가 바로 나 자신은 아닌지. 누구ㆍ무엇을 위한 猛犬으로 내가 살아가는 건 아닌지. 반문해볼 일이다.

    문득 그리스 犬儒學派 중의 한 사람인 디오게네스가 떠오른다. 평생을 통 안에서 ‘개 같은 생활’을 하며 무언가 가지려 노력하지 않았던 그를 똥개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쬐고 있던 햇볕을 가린 권력자 알렉산더대왕에게 다른 건 필요 없으니 제발 지금 내 앞을 좀 비껴 달라고 간청했다. 세상을 비꼬며 냉소적인 눈으로 살긴 했어도 대낮에 등불을 켜 들고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를 외쳐댔던 디오게네스는 바로 ‘밤을 세워 어둠을 짖는’ ‘志操 높은 개’였다.

    상대방을 개로 몰아세우며 서로 물어뜯던 저 무기명 대화방의 ‘개’ 화두는 어디로 향할까. 영화 「密陽」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햇살이 비치는 ‘시궁창’과 ‘마당’. 얄팍한 익명성에 용서를 빌며 교수사회도 그 기로에서 서성대고 있는 듯하다.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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