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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인문학,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가와 기업에 봉사하는 인문학이 형용모순인 까닭
[우리시대의 인문학,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가와 기업에 봉사하는 인문학이 형용모순인 까닭
  • 박찬길 이화여대·영어영문학
  • 승인 2009.06.15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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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경영’의 대상이 되고, 그 ‘경영’의 목표가 ‘생산성’의 향상과 ‘경쟁력’의 강화가 되는 순간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한다 하더라도 대학에서 인문학이 어떻게 취급될지는 자명해 보인다. 새로운 대학의 환경에서 인문학 교수가 예전보다 더 바쁘게 살아야 하고, 예전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쁜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문제는 오히려 간단할 수도 있다.

    진짜 문제는 인문학에는 예외 없이 적용되는 선택과 집중, 경쟁력과 생산성의 원칙들이 인문학 분야의 ‘정상적인’ 연구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다. 인문학이 상아탑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실천적으로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에 기여해야 한다는 데 토를 달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강요되는 무조건적인 경쟁과 이를 담보하기 위한 평가제도는 인문학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가짜 연구만 양산하고 인문학 연구의 건강한 인프라를 파괴한다.

    인문학은 본래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고 사회의 이상적인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처방전이다. 이를 위해 사회와 역사를 거시적으로 성찰하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이러한 인문학의 내용과 형식에 계량적인 평가제도를 통해 자연과학, 그것도 특정 응용학문의 학문적 관습을 덧씌우거나 경제와 경영의 이름으로 공리주의적인 효용과 자본의 생산성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문학의 학문적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다. 그것은 인문정신을 모독하고 인문계 교수의 직업적 자긍심을 파괴한다.
   

아무리 물질적 가치가 지배하고 실용주의가 숭상되는 사회의 요구를 외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국가와 기업에 봉사하는 인문학’이란 일종의 형용모순일 수밖에 없다. 인문학이 그 사회적 소임을 다하려면 국가권력과 자본의 힘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은가. 인문학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 관심과 지원은 인문학 고유의 이념과 원칙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줘야지 신자유주의적·경제주의적 정책의 집행수단으로 이용돼서는 곤란하다. 인문학도 국가와 사회의 지원을 받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무성을 당연히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인문학자들도 지원에 값하는 사회적 역할과 기여를 해야 마땅하며, 도덕적 해이를 방지할 적절한 제도적 장치 안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치가 연구자 혹은 대학 간의 소모적인 경쟁이나 무의미한 실적경쟁을 유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지원’이 곧 재정적 ‘투자’를 의미하는 경제주의적 관점에서는 한가하고 한심한 발상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 인문학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 재정적 투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와 사회가 인문학이 생산하는 가치와 이념, 그리고 인문학 연구자의 정신노동이 갖는 고유한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야 재정지원도 의미가 있다.

    불필요한 통제와 감시를 거두고 그들이 좀더 여유롭게 창의적인 상상력을 키우고, 좀더 안정적으로 본질적이고 전체적인 문제에 관해 비판과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을 연구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현재의 경제위기보다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됐을 때 이 사회의 어느 구석에서 ‘결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지혜로운 통찰력을 누군가 발휘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인문학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글은 반년간 <안과밖>(2009년 상반기 제26호) 시평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문학,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요약한 글입니다.

박찬길 이화여대·영어영문학

영국 글래스고우대에서 낭만주의 시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시인과 혁명:워즈워스의 시와 역사적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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