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1:15 (일)
[문화비평] 인도의 ‘더불어 살기’
[문화비평] 인도의 ‘더불어 살기’
  • 이옥순 서강대·인도근대사
  • 승인 2009.06.08 15: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도는 한동안 가난하고 더러운 제3세계의 대명사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낮고 문맹률은 높았다. 그래서 ‘뭔가 배울만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인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나도 한동안 제3세계의 취급을 받았다. 비세속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세속적인 정치와 경제는 거의 없는 나라로알려진 인도를 외부세계는 마치 옛날부터 가난한 땅이었던 것처럼 본질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가난은 인도 역사의 상수가 아니었다. 17세기의 인도에는 델리와 수라트 등 인구가 20만이 넘는 도시가 9개나 있었다. 동시대의 유럽엔 인구 20만 이상의 도시라곤 런던과 파리, 나폴리뿐이었다.
2001년에 나온 매디슨의 『세계 경제』는 영국이 인도에 올 무렵인 1700년의 인도가 세계 GDP의 22.6%를 차지하며 번영했음을 알려준다. 그 인도는 영국이 2세기의 식민통치를 마무리하고 떠난 직후인 1952년 세계 GDP의 3.8%를 차지하는 빈국이 됐다. 인도의 가난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릴 순 없어도 적어도 인도인의 원죄가 원인의 다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하려는 말은 인도가 한때 경제적으로 얼마나 잘 살았느냐가 아니다. 세상에는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가치가 있는 일이 많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그러하다. 가난한 인도는 1959년 티베트의 망명정부를 받아들였다. 넉넉하지 않은 처지에서 남에게 적선을 한 셈이다.

그 결과 인도는 1962년 중국과 전쟁을 치르는 대가를 치렀다. 동부에 있는 ‘시티 오브 조이’의 콜카타는 마더 테레사가 가난한 인도인들에게 사랑을 실천한 곳이다. ‘거리의 천사’가 넘쳐나는데도 인도는 천만 명이 훨씬 넘는 방글라데시 난민을 받아들였다. 난민들은 바로 이웃인 콜카타로 몰려들었다. 유학 중의 나는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분쟁 중인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인도에 피난처를 구하는 상황을 경이롭게 지켜보았다.

   인구가 초만원인 가난한 나라에서 외국의 난민을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에 논쟁이 없을 순 없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인도인들은 한바탕 논쟁을 벌이고는 늘 “여기는 인도다!”라는 결론을 냈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 인도 역사와 전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에서 난 배화교와 유대교가 힌두 왕의 보호를 받으며 인도에서 믿음을 지켜온 사실을 자주 언급했고, 물리력을 앞세워 인도에 온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평화롭게 공존한 점도 강조됐다.

   그래서일까. 인도 지도자의 덕목에는 ‘나와 다른 남을 받아들이는’ 포용성이 반드시 들어간다.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인물은 아소카, 아크바르와 마하트마  간디로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도 최초의 제국을 최대로 만든 기원전의 아소카는 대제국의 백성을 포용하려고 만민평등을 가르치는 불교로 개종하고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힌두와 이슬람의 화합을 도모한 20세기의 간디는 영국의 통치는 미워하지만 영국인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무굴의 이슬람 황제 아크바르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며 인도를 껴안았다. 이슬람을 믿지 않는다고 걷던 인두세도 폐지했다. 그러나 그의 손자 아우랑제브는 이슬람법을 힌두에 적용하고 인두세를 재징수하며 종교를 차별해, 번영을 이룬 아크바르와 달리 반란을 부르며 제국의 몰락에 기여했다.  

   어디 정치뿐이겠는가. 인도 역사는 돈 버는 일도 공존할 때 번영한다는 걸 일러준다! “내가 반을 접을 테니 너도 반을 접어라!” 예로부터 동남아에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넘나들며 교역을 한 구자라트 상인들은 이런 타협 방식으로 큰돈을 벌었고, 지금도 최대기업군으로 번영을 누린다. 구자라트 상인인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당사자들이 재판 없이 화해로 해결해 비용과 시간의 낭비를 줄이고 감정의 앙금을 없애는 방식을 이끌어내 명성을 얻었다. 

   소득이나 재산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그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듯이 국가도 경제적 잣대로만 평가될 순 없다. 수치로 포장되는 ‘발전’이란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에 우선할 순 없다. 사연 많은 5월을 보낸 2009년의 우리에겐 모든 이를 포용하고 화해와 타협을 생각하는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이옥순 서강대·인도근대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