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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침묵의 절대성
[문화비평] 침묵의 절대성
  • 교수신문
  • 승인 2009.06.0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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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필자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을 보면서 2004년 3월 철학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렸던 글의 일부이다. “왜 우리는 오늘 그동안 무능하다고 비판해왔던, 문제 많은 한 사람에게서 흐르는 피를 보는 것일까, 그 피의 색깔이 우리의 것과 같다고 확인하는 것일까. 그 피는 어떤 한 인종의 피도, 한 민족의 피도, 어떤 이념이나 정당을 지지하는 자들의 피도 아니고, 고통과 차별을 받았지만 이제는 목숨을 걸고 굴종을 거부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우리 모두의 피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 모두의 피가 같은 색깔이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시에는 노무현도 시민들도 전혀 피를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피라는 이미지가 그렇게도 마음에 파고들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때에도 그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상층부의 부당하고 잔인한 권력은 언제나 민중의 피를 요구하는 습관에서 못 벗어난다. 피는, 죽음은 절대를 말한다. 어떤 것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간 한 사람이, 그것을 절대의 지평 위에 올려놓고 사라져 간 것이다. 절대,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삶과 죽음 사이를, 관념과 몸 사이를, 순간과 영원 사이를,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언어가 아닌 침묵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절대가 정치적 관념이나 정치적 입장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언어로 정식화될 수 있는 문화의 맥락 내에서가 아니라 오직 몸·피·죽음이 가리키는 자연의 차원에서만 입증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1970년대 전태일과 1980년대 윤상원·이한열의 침묵의 말을 들으면서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들은 자살했거나 죽임을 당했지만, 모두 “사회에 의해 자살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역사에 그렇게도 큰 영향을 주고,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것도 부인할 수 없게 만들고, 그래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면, 그들이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사상이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몸이, 죽음이 우리의 영혼에 파고들어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꼼짝할 수 없다. 며칠 동안 마음은 어디로 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꼼짝할 수 없다. 사람들도 꼼짝 못하고 있다. 그들의 눈들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망자와 유가족에게는 너무나 죄송하지만, 나는 왜 지금 행복한가. 은혜를 입었고, 은총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좀처럼 듣기 힘들었고, 특히 근래에는 온갖 허위와 피상성에 가려 막혀 있었던 절대 진실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피와 뼈의 말을, 죽음과 생명의 말을 듣는 순간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여권 인사들과 조중동은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되뇌고 있다. 옳고도 옳은 말이다. 문제는 정치와 연관된 어떠한 것에도 있지 않고, 절대적 선과 평범하고 진부한 악(한나 아렌트) 사이의 대립에, 몸을 바쳐 부인할 수 없는 선을 지키려는 영혼과 타인에게 부당한 고통과 모욕과 죽음을 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꽉 막힌 관념 사이의 대립에, 잘못도 없이 얻어맞아 엎드려 있는 자의 등과 그 등을 짓밟는 구둣발 사이의 대립에,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세 살배기의 얼굴과 죽여 놓고도태연한 그 늙고 뻔뻔스러운 얼굴 사이의 대립에 있기 때문이다.

    절대는 이런 경우에 있다. 지금 문제가 좌우나 정치적 관점들 사이의 갈등에 있는 줄 아는가. ‘절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절대가 철학책에, 헤겔이 말하는 절대 정신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절대’라는 이 거북한 단어를 아무 거리낌이나 주저 없이 말할 수 있게 해준 고인에게, 철학하는 사람으로서 또한 감사드린다. 지금, 여기에 절대가 있다.

    시민들이 지금 단순히 슬프고 애처롭고 절망해서, 나약해서 울고 있는 줄 아는가. 그래서가 전혀 아니고,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은혜를 입었고,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거대한 은총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한―‘정치적’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인간 자체의 저항과 투쟁의 의미를 이제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지금 애인에게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한 점 부끄러움이나 주저 없이 ‘그’, 바로 ‘그’에게 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박준상 전남대 철학교육연구센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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