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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교수와 火田民
[문화비평] 교수와 火田民
  • 조환규 부산대·컴퓨터공학
  • 승인 2009.05.2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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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형 화전이 시작되면 너도나도, 심지어 이전에 농사라고는 지게 작대기도 잡아보지 못한 갯가의 어부들까지 변장을 하고는 산에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화전민으로서의 성공은 일단 남보다 먼저 올라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목 좋은 곳을 확보하는 것에 달려있다. 좋은 자리를배타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떼거리의 완력이 필요하다. 하여 그 화전민 무리가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엮어 있다면 그들은 화전민에서 화전단으로 승급하게 되고, 화전 작업은 배타적인 상황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화전이 시작되면 일단 그 산에서 빼먹을 수 있는 것은 뿌리는 물론이거니와 씨앗까지 모조리, 남김없이 탈탈 털어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시는 이 산에 돌아와서 풀섶을 뒤적거릴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 때 포스트모더니즘 산을 화전으로 홀라당 태워먹던 때가 있었다. 이것도 포스트모던이요, 저것도 포스트모던.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포스트모던하기가 가능하다는 그 주장조차도 포스트모던 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포스트모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며칠 전 운동 겸해서 올라가본 포스트모던 산에는 다람쥐 한 마리, 밤톨 하나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둘러보니 요즘은 라깡 산과 지젝 산에서 화전이 시작된 것 같은데 그 불길의 끝이 어딘지 궁금하다. 미국식 금용자본주의 산은 거의 불이 꺼진 듯. 눈치 빠른 자는 이미 하산한 지 오래고. 과학기술 화전민 역시 분발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과학 화전민은 필자가 학위과정 시절에 상온핵융합 실험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플라이쉬만의 상온핵융합이 성공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무렵 국내 두 군데의 대학에서도 그 실험의 재현에 놀랍게 성공했다.

덕분에 그 위대한 실험을 고스란히 재현한 두 연구팀에는, 필자가  기억하기로, 억대의 연구비가 긴급 지급됐다. 폰즈와 플라이쉬만이 끌려가기 전까지 모든 것은 순조로웠지만 끝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로 인해서 상온핵융합 산은 화전으로 남김없이 홀라당 타 버렸다. 생각해보니 줄기세포 화전민 사건은 우리 화전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불행히도 제대로 경작도 하기 전에 방화인지 실화인지 모를 연유로 그 산 자체가 몽땅 타버렸고, 몇몇 화전민은 관가에까지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상온핵융합, 줄기세포 화전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역시 화전민은 잽싸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에도 화전의 역사는 다시 되풀이 된다. 지금의 과학, 기술 화전민들이 몰려다니는 산맥의 삼대 봉우리는 저탄소봉, 녹색봉, 그린봉이 아닐까 싶다. 미디어통신법의 개정을 통해 사람들의 물리적 이동을 최소화시키고, 그로부터 호흡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녹색성장과 맞닿아 있다는 녹색 전도사님의 말씀은 감동을 넘어 전율까지 선사한다.
녹색 화전민들의 노고가 대단하다. 녹색금융, 녹색서비스, 디지털 대운하, 그들의 창의력에 필자와 같은 멀뚱한 인근주민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불평분자에 의하면 연구주제에 녹색, 그린, 저탄소등이 포함돼 있지 않으면 아예 제안조차도 못할 정도라고 하니, 어부도 광부도, 빨래터의 아낙도, 관아 아전까지 모두 호미와 괭이를 들고 녹색산으로 기어오르는 장대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러니 멀쩡한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태양광 발전판을 깔아놓고는 희희낙락 박수를 치는 한심한 자들이 득세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몽골-알타이 산에도 화전의 낌새가 보이는데, 그동안 은인자중하고 계시던 연구자들의 화려한 둔갑술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자생적 화전민은 어쩔 수 없지만 관아에서 먼저 나서서 화전민 양성을 독려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녹색성장의 의미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색을 녹색으로 둔갑시키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닥치는 대로 녹색 스티커를 붙이고, 또 밉살스러운 놈 이마에 적색 스티커를 붙여 찍어내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 그렇게 녹색과 적색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적록색맹이라 부른다. 그것은 시각장애 증세의 일종이다.

조환규 부산대·컴퓨터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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