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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어머님의 숙제
[學而思] 어머님의 숙제
  • 남영만 경남대·수학교육
  • 승인 2009.05.1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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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집에는 조그마한 온실 창문이 있어, 나는 이 창문을 통해 가끔 바깥세상을 관찰하곤 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온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스팔트 위에 점철된 삶들의 모습은  그 날의 날씨나 시간에 따라 항상 변화무상하다. 이 창문 속에서 나의 하루의 일상이 시작됨과 동시에 마무리 되고, 나는 그 속에서 수많은 상상의 날개를 펴기도 한다. 나는  가끔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가 하면, 전쟁터에서 낙오된 외로운 병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도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 내는 천재 수학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구십이 넘는 老母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저녁이면 매일 어머님의 숙제를 도와드려야 하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다른 약속을 하지 않고  일찍 집으로 곧장 간다. 구십이 넘는 노인이 무슨 숙제를 해야 하는지 모두 궁금하게 생각 하지만 노트 두 바닥 정도 분량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산문형식으로 적고 계신다. 어머님이 기록한 내용에 대해 아들인 내가 먼저 검사를 하고 조언을 해 드리는 것이 나의 몫이다. 가끔은 글 내용에 대해 격론을 벌일 때가 있다. 이때가 가장 힘이 든다. 아마 市廳의 노인 복지사들이 경로당 노인들에게 치매를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노인의 눈높이에 맞는 숙제를 주고 검사를 해 좋은 작품은 전시 등을 통해 노인들의 자긍심을 높여 서로 경쟁을 붙이는 것 같다.

인간은 나이가 많으면 어린아이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며칠 전의 일이다. 최근 정세를 당신께서 보신 대로 기록한 내용이다. 전임 대통령의 도덕성에 대한 내용인데 신문지상에서  떠드는 여론들을 한쪽 시각으로만 보셨는지 아니면 당신께서 그렇게 되길 예단하고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순진하고 외현적이면서 격렬한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차마 글을 읽기가 힘든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한참 읽다가 글을 다소 수정하시길 권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양보를 절대 허락 하지 않으셨다. 한참 실랑이를 벌였지만 어머님의 아집으로 결국 내가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기서 노모와의 사소한 일상적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노모와의 격론을 겪으면서 내가 요즘 우리 대학생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 놓고 싶어서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번쯤 ‘大義名分을 따른다’는 식의 말을 들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즉, 나의 개인적인 사견이나 주장을 버리고 전체 구성원들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거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주로 어떤 의사결정 상황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나는 이런 사고가 요즘 대학생들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사례를 많이 발견하곤 한다. 

그러기에 나는 대의명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를 두고 싶다. 아니, 싫어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 명분은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으로서 잘 포장돼 우리의 판단을 가끔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이 길을 가다보면 대문짝만한 명분 앞에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바지를 입은 소년의 엉거주춤한 자태를 닮을 때가 많았기에 나는 이 단어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에게 최근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표현할 수 있는 과제를 부여해 보곤 하는데,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과는 관계없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나 인터넷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높은 내용으로 선정된 것을 그대로 복사해서 제출하는 사례를 발견한다. 내가 바라는 20대 대학생은 결코 이런 그림은 아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면 설사 주장이 나중에 틀릴지언정 그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패기와 논리적 대응방법을 찾는 번뜩이는 銳智를 가지길 바란다. 물론 젊은이들을 나쁜 길로 가게 하기 위함은아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은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서,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만을 뒤에서 쫓아가기 급급한 경향이 많아 가슴이 아프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도 이룰 수 없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이 경험한 나로서는 우리 대학생들이 지금은 대의명분을  망각 하더라도 시행착오와 실패하는 경험을 쌓아 자신의 가치관과 주장을 내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남영만 경남대·수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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