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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시적 상상력과 活看
[딸깍발이] 시적 상상력과 活看
  •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 승인 2009.05.0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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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 용인 민속촌에 들러 조선시대 양반들이 살던 한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문득 집 한쪽 기둥에 붙은 ‘天地間詩書最貴’란 立春 祝句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때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던 생각. ‘전통시대에 詩란 천지를 알게 하는 밑천이었구나!’시적 상상력이 살아 움직이던 건강한 때가 있었다. 사랑을 고백하는 수사, 항거의 혀, 더러운 바깥을 향해 뱉는 침으로써 시는 살아있었다. 도구화 된 理性의 골을 때리며 시는 ‘살아있는 관찰력’(活看)의 가늠자 역할을 해왔다.

사회에서나 대학에서나 이제 그런 꿈틀대던 시의 힘, 시적 상상력을 기대하기 힘들다. 철학하는 사람들도 三經이 뭔지 지껄여대지만 詩經은 거의 읽지 않고, 사상가들의 문집을 들춰 연구를 해대지만 그 첫머리를 장식하는 詩篇들을 거의 무시한다. 시에 대한 지적 관심은 전공자의 논문 속에서나 발견되며 인문적 교양의 기반을 이루진 못했다. 논리-논문에 안주한 인문학자들은 자신이 만든 투명 유리관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다.
직관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감성을 장막 뒤에 숨긴 채 ‘나’라는 직함을 떳떳이 소개하지 못한다.

야생으로 번득이던 詩的 감각들은 이제 거의 돈 되는 곳으로 몰려가 영상 이미지와 결합하거나 엄청난 몸값의 광고 카피로 이직해 돈맛에 젖었다. 시대는 운문에서 산문으로 전환되었고, 직관적 언설보다는 스토리텔링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문단은 또 어떤가. 각종 문예지는 시인 자격증을 파는 장사꾼으로 전락했고, 각종 문학상은 학연, 지연에 기반해 나눠먹고, 각종 문단 파벌은 패거리들을 戰士처럼 거느리며 멤버들만의 아성을 쌓아왔다. 중앙과 지역의 문학 단체들은 시인들의 정치적 욕망을 채울 감투를 제공하며 시인들을 권력화해 왔다. 

나도 詩를 쓴다. 그러나 가능한 한 시인들을 만나지 않고 문단에도 출입하지 않는다.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단지 내 스스로의 골칫거리를 치유하고, 허물어지기 시작한 상상력을 갈고 닦아 학문과 생각의 젊음을 지켜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나를 치유하는 의사이자 새로운 발상을 만들어 내는 생각의 요리사이다. 사실 시 쓰기는 돈 되는 일도 아니고, 연구 업적 쌓는 일도 아니다. 스스로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도 아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일이 꼬일 때, 스트레스가 쌓일 때, 논문 진도가 안 나갈 때, 시는 그런 고난을 영양소로 발아한다. ‘철학하는 놈’이 한가하게 무슨 시나 쓰냐며 가끔 주위로부터 비아냥거림도 듣는다. 별 신경 쓰지 않는다. 누군가 나더러,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남아돌아’ 시를 쓴다고 생각하면 그건 사실 오산이다. 나는 실제로,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일과의 바퀴를 힘겹게 돌리며 살아간다.

대학 교수 생활은 솔직히 말해서 단조롭기 그지없다. 타성에 젖고 보수화돼 권위에 안주하기 시작하는 순간, 창의성보다는 아카데미즘에 기대고 상상력보다는 매너리즘에 친하다. 나는 그런 것이 싫은 것이다. 굳어 있는 생각과 풍경을 흔들고 찝쩍대며 일깨워 가지 않으면 시선은 고착되고 발상법은 녹슨다. ‘개 한마리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개 백 마리가 그 소리를 듣고 덩달아 짖는’분위기에 갇힐 때 한껏 튀는 생각이 나올 리 없다. 시는 원초에 돌아가서 사물을 다시 바라보는 눈, 무언가를 입체화하고 직관적으로 이미지화하는 힘을 가져다준다. 발상법의 ‘차이’는 일상에서 결국 ‘일을 저지르는’ 것이니, 튀면 후회가 있을 거라는 ‘亢龍有悔’란 교훈마저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교과부 산하 3개 연구관리 전문기관인 과학재단·학술진흥재단·국제과학협력기술재단이 통합돼 6월말 한국연구재단으로 출범할 예정이다. 이제 그 재단이 어떤 새로운 학문의 융합·복합·통합을 이뤄낼 것인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자, 인문학은 어떤 새로운 길을 열어 갈 건가. 지금 시적 상상력에 빗대어 학문의 活看을 꿈꿔 본다.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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