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8:25 (월)
[딸깍발이] 인간의 惡에 관한 진실
[딸깍발이] 인간의 惡에 관한 진실
  • 김혜숙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9.04.13 1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혜숙 편집기획위원

1963년, 한나 아렌트는 <뉴오커>라는 잡지에 아이히만 재판에 관한 몇 편의 보고서를 게재했다.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잡지사의 후원으로 참관하고 쓴 글이었다. 이 보고서는 후에 후기를 덧붙여 ‘악의 평범성’이란 부제를 달고 책으로 출판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선욱 교수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로 번역해 출판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죄악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이히만은 아렌트에게 너무나도 무해한 인간으로 보였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단지 빠른 출세와 진급을 원하고 상부의 명령과 가족에 충실했던 군인이었다. 스스로 ‘이상주의자’라 생각했던 아이히만은 우리가 영화나 소설 속에서 만나는 악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으며 직업 안에서 배운 상투적인 관료적 용어를 빼면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악이란 무슨 흉한 모습을 하고 드러나는 것이기보다는 생각의 무능성, 타자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성, 역지사지를 할 줄 모르는 상상력의 빈곤이 만들어내는 결과라는 것이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부제 안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악이란 것이 겨우 그런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고 끔찍한 절망과 불행을 경험하게 한 악행이란 것이 그런 밝은 얼굴 속에서 일어난 것이란 말인가? 그 모든 악행이 겨우 자신의 말을 할 줄 모르고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성 때문에 빚어진 것이란 말인가? 아렌트는 유대인이었지만 이 보고서로 인해 같은 유대인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사유의 불능성과 상상력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천박하고 악한 현실은 끔찍했던 나치시대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보통 악행이나 거짓된 행위를 할 때 그 행위를 하는 당사자는 그것이 악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잘 발달된 심리기제가 있어서 선악에 관한 다른 정상적인 지식과 그런 행위들이 모순되지 않도록 조절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학살에 관련했던 사람들도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거짓말과 살인에 대한 지식과 믿음의 체계가 그들이 저지른 학살이란 행위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엄격한 언어규칙을 따랐다. 그것은 ‘학살’, ‘박멸’ 같은 명백한 단어를 쓰지 않고 대신 ‘최종해결책’, ‘특별취급’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이송은 ‘재정착’과 같은 아리송한 암호 같은 말을 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인간다운 삶에 대한 그들의 정상적 믿음체계를 혼란에 빠뜨림 없이, 독가스를 주입시키고 집으로 돌아와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고 가족애를 나누는 일상적 인간의 삶을 유지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온 나라가 연쇄살인 문제로 시끄럽더니 이제는 또 뇌물과 성매매 문제로 시끄럽다. 우리는 분명한 뇌물과 부정한 돈을 ‘떡값’, ‘촌지’, ‘전별금’, ‘위로금’, ‘사례비’ 등으로 전환시켜 부르며, 성매매를 ‘원조교제’라는 말로 바꿔 부르는 언어규칙을 일상화하고 있다.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정상적인 지식과 어긋나게 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바꿔 불러야 정신분열을 일으키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발달하고, 자기 정당화의 논리가 정교해진 오늘날에 있어서 이 같은 언어규칙은 더욱 더 복잡하고 교묘해지고 있다. 이것의 많은 책임은 언어를 이용해 자신을 유지하는 언론집단과 넓은 의미의 학문집단에 있다. 말의 무능성과 사유의 무능성을 교정하는 책임도 이 집단이 갖는다. 그런데 이 집단 역시 자신이 아는 상투적 관용어밖에는 사용할 줄 모르는 무능성을 보인다면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김혜숙 / 편집기획위원·이화여대 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