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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30代 교수와 40代 교수
[딸깍발이] 30代 교수와 40代 교수
  • 박경미 편집기획위원 / 홍익대·수학
  • 승인 2009.04.0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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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민드라마’ WBC 야구경기에 필자 역시 꽤나 심취했다. 강의 중 DMB로 야구 중계를 보는 학생을 묵인해줄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점수 변화가 생기면 알려달라고 특명을 내릴 정도였다. WBC가 짜릿한 희열을 주었던 것 이상으로 내게 의미를 주었던 또 다른 측면은 나이 듦을 생각하는 기회를 준 것이다.
1980년대 20대 초반에 국내 프로야구를 관전할 때와 이제 40대 중반에서 WBC 야구경기를 보는 안목이 많이 달라졌다.

프로야구가 출범해서 인기몰이를 하던 시절 야구 선수 리스트와 기록을 줄줄이 외우고 있던 내게 야구경기는 객관적인 숫자게임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번 WBC에서는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때 기록에는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타자가 볼을 하나하나 고를 때 어떤 생각이 스쳐갈까, 감독과 타격코치는 어떤 심리 상태에서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까, 현재 타자의 어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지켜볼까, 타자와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이는 투수와 포수의 머리에는 어떤 계획이 서 있고 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제대로 이루어질까 등 마치 하나의 상황을 여러 개의 카메라를 동원하듯 입체적으로 해석하게 됐다.

이제는 환호와 좌절감, 개개인의 심리가 종합된 인간 드라마로 여겨진다. 장황하게 야구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강의에서도 유사한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경륜이 깊은 교수님들에 비하면 여전히 초보이지만, 올해로 부임한지 10년째, 강사 경력까지 합치면 15년째이다. 강의 초기에는 현재보다 서툴렀지만 의욕이 넘쳤고, 가능한 많은 내용을 최대한 밀도 있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학생들의 ‘심리’보다는 가르치는 학문 내용의 ‘논리’를 더 충실히 따라갔다. 요즘은 내용의 논리와 이를 이해해야 하는 학생의 심리가 머릿속에서 함께 지나가기 때문에 내용을 한 번 더 부연 설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예를 찾느라 고심하게 된다.

철지난 유머에 따르면 30대 교수는 모르는 것까지 아는 척하며 가르치고, 40대 교수는 아는 것만 가르치며, 50대 교수는 학생들이 이해할 만한 것만 가르치다가, 60대에 이르면 기억나는 것만 가르친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게을러지는 교수들을 빗댄 유머이지만 그 변화는 반드시 성의가 없어져 나타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젊었을 때에는 가르쳐야 하는 내용에 관심을 두지만, 연륜이 쌓임에 따라 그 내용을 이해해야 하는 학생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된다.

교수 행위는 학생에게(간접목적어) 지식을(직접목적어) 가르친다는 것으로 분해할 수 있으므로, 영어 문장의 5형식 중 제4형식, 주어+동사+간접목적어+직접목적어에 해당한다. 강의에서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두 개의 목적어 중 세월의 흐름은 우선순위를 직접목적어에서 간접목적어로 옮겨가게 하는 것 같다.

수십 년 전에 읽었던 고전에 해당하는 소설을 읽어보아도 세월에 따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예전에 분명 읽었던 소설인데 다시 읽으면 이런 대목이 있었는지 새삼스럽고 그 때는 왜 이런 감동이 밀려오지 않았는지 의아해진다.

긴 세월을 거쳐 오며 다양한 경험을 해서인지 주인공과 나 스스로 혹은 주변인물을 동일시할 수 있는 경우가 많고, 주인공에 대한 행태와 심리 묘사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책을 읽지 않는 세태를 빗대어 고전은 ‘삼척동자도 제목은 알지만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책’이라고 냉소적으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고전은 ‘시차를 두고 읽었을 때 그 감동의 종류와 깊이가 달라지는 책’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 옛날이여’를 자조적으로 읊조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포용, 긍정, 관용, 여유와 같은 단어들과 친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서 학생들을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 것, 그것이 세월과 함께 따라오는 보상인 것 같다.

박경미 편집기획위원 / 홍익대·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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