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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看書痴’가 그립다
[문화비평] ‘看書痴’가 그립다
  • 김기태 세명대 교수 미디어창작학
  • 승인 2009.03.3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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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당국의 불온서적 지정 조치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군 법무관 중 두 명이 명령 불복종을 사유로 파면당한 사태를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군인들에게까지 좋은 책을 가려 읽히려는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그렇다면 불온서적 지정은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명령이었을까.

각설하고, 조선시대 규장각 초대 검서관을 지낸 李德懋는 스스로를 ‘看書痴’로 불렀다고 한다. ‘책에 미친 바보’라는 뜻이란다. 실제로 ‘讀書百遍義自見’을기치로 내세웠던 우리 전통의 독서법에 따라 읽고 또 읽어야 했던 것이 사대부들의 운명(?)이었으니, 옛날에는 온통 바보 천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 학교교육에 있어 교과서를 통해 설정된 교수·학습 내용의 범위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의 4대 기초학습영역으로 간추려진다. 그리고 이는 계산하기, 문제해결하기, 인간관계맺기 등의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고스란히 전 국민 독서의 당위성으로 이어지곤 한다. 하지만 독서를 권장하는 일은 곧 실리를 동반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초·중등학교 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학입시의 양태가 학생들의 독서행위에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예컨대, 대학별 논술고사의 영향으로 국내외 고전과 베스트셀러가 더욱 많이 읽히는가 하면, 대학입시에서 논술의 비중이 낮아지는 경우에는 학생들의 독서행위 또한 약화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학교현장에서 늘 강조돼 왔던 독서교육이 대학입시개선안과 맞물려 폭발적인 위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입시에 종속된 독서교육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은 데다 기존에 쌓아놓은 독서교육의 토대마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아울러 교육당국이 주도적으로 추천도서목록을 만드는 일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그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줌으로써 독서의 획일화와 강제성을 부추기는 위험한 일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부 교사들마저도 “어떤 책이 학생들에게 좋은 책인지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일선교사들의 추천도서목록 맹신은 당연한 일”이라며 “좋은 책 목록은 교사와 학생들이 책을 함께 읽으면서 수시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학교교육과 함께 국민독서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존재는 바로 매스 미디어다.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과 발명품을 선정하는 작업에서 첫 번째를 장식한 것은 독일 구텐베르크와 그의 인쇄기였다.

덕분에 구어 문화가 급속히 몰락하고 문자 문화가 팽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등장한 텔레비전을 비롯한 전자매체의 영향으로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시각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이며, 파편적이기보다는 통합적인 성격을 지닌 수용자를 양산해 내고 있다. 이처럼 각기 다른 매체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장점을 주고받으려는 노력이 바로 매스 미디어에서벌이는 독서운동이 아닐까 싶다. 물론 좋은 책을 소개하는 효과보다는 팔리는 책을 더욱 더 잘 팔리게 하는 효과를 부추긴다는 비판도 많았지만, 각종 매스 미디어에서 펼쳤던 독서 캠페인이 국민독서운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한편, 중앙 일간지를 비롯한 방송 및 잡지에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어느 단체 혹은 대형서점 종합집계 등의 단서 아래 분야별 혹은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을 발표하고 있다. 이른바 공식적인 광고이자 홍보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표는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 틈엔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도서를 신뢰하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도서 구매로 이끄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베스트셀러(bestseller)는 곧 좋은 책(best book)일 것이라는, 그래서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심리작용까지 부추겨 해당도서의 판매부수 신장에 적잖은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과연 베스트셀러는 모두 좋은 책인가?” 하는 회의로부터 매스 미디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대학에서도 이제 독서는 중요한 화두다. 많은 대학들이 학년별 필독서 목록을 만들고 “읽어야 할 책은 반드시 읽게 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다. 나는 차라리 1학년 때는 내내 책만 읽혀도 좋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예견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잘 알기 때문이다. 출판평론가라는 어쭙잖은 타이틀 덕분에 오늘도 어김없이 홍보용으로 배달된 신간들이 내 앞에 쌓인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레 새 책들의 속살을 들여다볼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어쨌거나 ‘책에 미친 바보’들이 캠퍼스를점령하는 날이 올 때까지 나는 기꺼이 책의 유혹을 받아들일 것이다.

김기태 세명대 교수 미디어창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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