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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한 번역자의 蛇足
[문화비평] 한 번역자의 蛇足
  • 박준상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철학
  • 승인 2009.03.09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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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 전 필자가 번역한 한 권의 책(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이 출간됐다. 모름지기 역자는 저자와 독자의 가교로서 원전을 충실히 번역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면 되고, 필요하다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을 덧붙이면 된다. 어쨌든 필자는 그 역자의 역할을 한 번 했고, 그에 따라 한 권의 번역서가 세상에 나왔다. 이제 그 책을 매개로 이루어질 저자와 독자 사이의 대화와 소통만 남은 것이고, 역자는 조용히 ‘빠지면’ 되는 것이다.

필자도 한 때는 이 번역서의 저자인 모리스 블랑쇼의 사유에 깊이 매혹되었던 시기가 있었겠지만, 아무리 열정적인 사랑이라도 10년이 넘으면 시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담담한 상태에 이르게 마련이다. 블랑쇼가 위대한 철학자이자 작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그의 사상이 어떤 형태로든 내면에서 지워지지는 않을지라도 지금 스스로 ‘블랑쇼주의자’라고 자임할 수도 없다.

‘빠져 있을 수밖에 없는’ 역자인 필자는 그래도 마음속에 뭔가 할 말이 하나 더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마침 고맙게도 <교수신문>에서 원고를 부탁해 와서 이 기회에 그 말을 풀어 놓고자 한다.
번역자가 번역 책 바깥에서 다시 사족을 다는 것에 대해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문제는 블랑쇼의 은둔이다. 잘 알려진 대로 블랑쇼는 한 번도 강의는 물론 강연도 한 적이 없고, 공식 석상에 나타난 적도 없으며, 그의 사진은 몇 장밖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의 은둔은 프랑스에서 하나의 신화처럼 남아 있으며, 우리에게도 묘한 신비감과 더불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개인의 삶이, 특히 유명인의 경우, 자발적이든 아니든 인터넷을 통해 자주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서서 보면 그렇다.
그는 왜 홀로 글만 썼을까. 우리는 몇 가지 대답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대답은 개인의 기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답이 가능한데, 사실 그는 매우 조용하며 내성적이고 인간관계에서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고 신중했었다고 한다(그러나 그는 항상 심각한 사람은 아니었고, 친구들 앞에서 농담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의 은둔이 예외적인 한 사람의 것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두 번째 대답은 정치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약 6년간 극우 신문들에 정치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그러나 그의 극우 사상은 나치와 연관이 없었고, 정신주의적·이상주의적 색채가 강했으며, 무엇보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의 군사적 힘과 야욕에 주의하지 않았던 프랑스 정부에 경고를 주기 위한 일종의 민족주의였으며, 40년대 초반부터 그의 정치적 입장은 점차 좌익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블랑쇼가

그 활동을 접은 시기와 그가 은둔하기 시작한 시기가 일치한다.
세 번째 대답은 문학에 자신을 헌신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 대답은 단순하지만 가장 결정적이다. 한편 그에게 문학은 사회체제, 또한 언어 의미 체계에 ‘바깥’이 침입해서 균열을 내는 과정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법 또는 윤리의 차원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회의 구조와 위계질서를 거슬러 나아가는 어떤 반사회적이고 자연적인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블랑쇼의 은둔은 문학의 요구에, 즉 사회의 밑바닥 또는 ‘바깥’에서의 자연적 실존이라는 요구에 부응한다. 그것은 사회 그 바깥으로 밀려난 자에게, 적어도 사회적 가치 기준들 그 아래에 놓여 있는 익명의 생명 또는 ‘아무개’의 실존에 응답한다.

블랑쇼는 다름 아니라 사회적 권력 바깥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은둔은 사회적 권력의 포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외래사상들을 수용하는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지나칠 정도로 한 외국 사상을 단순히 사회적 흐름(또는 간단히 ‘유행’, 그것도 하나의 권력의 흐름이다)에 따라 받아들이고 폐기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블랑쇼의 은둔은 그의 글을 사회적 권력이 있는 위대한 작가의 글이 아니라 한 ‘이름 없는’ 자의 글로 읽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그의 글을 바로, 아마도 ‘이름 없을’자기 자신과의 대면 속에서 읽기를 요구한다.

박준상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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