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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惡手의 정치학
[대학정론] 惡手의 정치학
  • 교수신문
  • 승인 2009.03.0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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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술어 중에 ‘악수’라는 말이 있다. 올바른 수순이나 합당한 행마법에서 벗어난, 아주 나쁜 수를 악수라 한다. 상대방이 올바르게 대응할 경우, 당연히 악수는 그것을 둔 사람 쪽에 매우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바른 행마법을 모르거나 욕심이 지나쳐서 무리한 이익을 얻으려다 보면 이런 악수를 두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심각한 손실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악수는 상대를 도와주는 이적수이기도 하다.

바둑을 이기려면 너무 느슨한 수(緩着)나 악수를 상대방보다 덜 두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둔 완착과 악수를 적절하게 추궁해서 전과를 거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문제가 생겨난다. 저쪽의 완착, 악수를 몰아쳐서 이득을 거두려는 욕심이 지나치면 이쪽에서 또 무리를 하고 악수를 두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상대방이 둔 악수의 결함은 불분명해지고 이쪽의 악수가 오히려 치명적인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저급한 바둑일수록 이런 악수가 많아서 한 판을 두는 동안 엎치락뒤치락 하는 ‘악수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지난 세월 동안이나 요즘이나 우리 사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보노라면 이런 바둑을 연상케 하는 점이 드물지 않다. 격렬한 갈등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충돌이나 폭력을 계기로 한 사태의 급전 그리고 반격의 악순환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실수나 악수에 正手로 대응하지 않고 무리하게 반격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어느 세력에게도 이로울 수 없다. 무리수가 악수를 낳고 악수가 다시 무리수를 부르는 이 ‘악수의 정치학’은 사회 전체를 황폐하게 할 뿐이다.

악수 못지않게 바둑에 흔한 것으로 ‘꼼수’가있다. 이것 역시 온당한 수가 아니면서 상대가 착각하거나 실수하기 쉬운 장면을 만들어 놓고 횡재를 노리는 심리에서 나온다. 바둑에서는 하나하나의 착점이 지닌 효율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꼼수에 걸려들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에게 손해로 되돌아온다. 몇 번의 꼼수가 통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판세가 회복 불가능하게 되는 일이 많다. 그럼에도 꼼수를 두는 것은 폭리의 유혹 때문이다. 성실하게 노력해서 조금씩 벌어들이기보다는 한 번에 크게 벌어이른바 ‘인생 역전’을 해 보겠다는 심리가 꼼수를 낳는다.

바둑을 오래 두어 보았지만 꼼수 쓰기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高手가 없다. 정수를 찾기 위해 고심하지 않는 자세에서 행마의 길이 제대로 보일 리 없고, 바둑 실력이 늘 수도 없다. 고수가 못되니 꼼수로써 이겨 보려 하고, 꼼수에 자주 의존하다 보니 정수를 보는 눈이 흐려지는 이 순환관계를 ‘꼼수의 악순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나마 바둑이 다행스러운 것은 악수와 꼼수의 악순환이 자꾸 일어나도 그것이 바둑판 위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잘못 둔 바둑은 멋쩍게 웃으면서 포기하면 되고, 바둑판을 쓸어 버린 뒤 잊으면 그만이다. 성실하게 살던 사람이 바둑판 위의 가상적 대결에서 악수나 꼼수를 좀 썼다 해서 크게 죄될 일도 없다. 그 때문에 대마가 죽어도 현실적 손해가 아니니 남에게 미안할 것도 없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현실정치에서 자주 일어난다는 데 있다. 정당 내부에서, 정당들 사이의 다툼에서, 그리고 정부 기구와 사회 세력들 사이의 관계에서 무리수와 악수가 빈발한다. 멋드러진 정수인 줄 알고 환호했던 일들이 나중에 보니 꼼수로 드러나는 예도 드물지 않다. 악수와 꼼수는 이를 응징하기 위한 상대방의 적개심을 충동하고, 그래서 다시 반작용의 무리수가 등장한다. 판 위의 게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하나의 돌처럼 놓여 있는 현실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니 끔찍할 수밖에 없다.

바둑이 선의의 투쟁이면서 조화의 추구인 것처럼, 사회의 진로에 관한 여러 세력들의 다툼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면마다 가장 온당한 길을 찾는 ‘정수의 정치학’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글을 끝맺고 싶지만, 그런 교과서적 충고가 공허하게 느껴질 만큼 악수의 정치 게임은 일상화돼 있다.

김흥규 논설위원 /고려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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