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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교과서 유감
[學而思] 교과서 유감
  • 김응종 충남대·사학과
  • 승인 2009.03.0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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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한국 근ㆍ현대사 교과서의 ‘수정’ 문제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언론을 통해 보도된 대로 그 교과서가 친북 성향을 띠고 있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아마도 반공 교육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북한에 대한 기술이 다소 우호적인 반면 남한에 대한 기술은 지나치게 비판적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에 대해서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려고 했고,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려고 애쓴 것 같았다. 교과서 저자들이 북한에 대한 비판을 자제한 것은 아마도 통일에 대비해서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그 책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전문연구서이거나 논문이라면 저자의 입장이 어떤 것이든지, 그 입장을 아무리 노출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전문연구서에서는 저자의 입장을 분명히 노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토론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서의 사회적 기능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의 경우는 다르다. 교과서는 학생들에게는 마치 聖書와 같은 것이어서 독자의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교과서의 토씨 하나라도 그대로 암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교과서는 전문연구서와 달리 ‘대화’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저자들은 본의 아니게 자기의 주장을 강요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교과서의 저자들은 자기의 입장을 노출한다거나 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써서는 안된다. 교과서는 명백한 사실만을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그 교과서의 저자들이 만일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가지고 교과서를 썼다면, 그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그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독자들은 저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북한에 대해 환상을 품거나 남한에 대해 절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의도는 사실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역사가 정치의 시녀가 되는 일은 역사가들 스스로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과서를 검토하면서 정작 문제가 있다고 느낀 부분은 일제시대에 대한 기술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기술을 살펴보니, 한결 같이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실제로 토지를 소유하거나 경작하고 있던 수백만의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빼앗겼다”는 식으로 기술돼 있었다. 심지어 어떤 교과서는 일제는 전국 농토의 40%를 빼앗아 갔다는 구태의연한 기술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침,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있어서 자세히 물어 보았는데, 40% 라는 수치는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수치이며, 관습적으로 경작권을 인정받아오던 비지주들이 경작권을 잃어버리기는 했어도, 개인이건 종중이건 지주가 토지를 빼앗긴 사례는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교과서의 표현은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교과서를 읽는 학생들은 일제가 총칼을 사용해 ‘강제로’ 토지를 빼앗았다고 이해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경제 수탈”, “토지 약탈”, “토지 수탈”, “쌀 약탈”, “산업 침탈” 등의 자극적인 표현들은 교과서가 “수탈론”의 입장에서 기술돼 있음을 증언해준다.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이 ‘사실’과 다른데 왜 그것을 수정하지 않는가 하고 전공자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는 현행 교과서의 기술은 분명 잘못됐지만 그것을 수정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수반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했다.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커다란 ‘입장’의 문제이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사실’과 ‘입장’이 대립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역사교과서는 무조건 ‘사실’에 의거해서 기술돼야 한다. 역사 교과서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징용, 종군위안부 등과 같은 민감한 사안도 마찬가지다. 징용은 ‘강제’로 진행됐지만 정신대 모집은 ‘강제’로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강제로 끌려갔다”식으로 기술된 것은 잘못이다. 종군위안부는 일본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모집 관리됐기에 반인륜적인 범죄임에 틀림없다.

허나 종군위안부 모집은 ‘강제’보다는 속임수’로 이루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 만큼 교과서 기술과 표현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역사 전쟁에서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사실’이라는 점을 교과서 집필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독도는 일본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가 말했듯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애국이다.

김응종 충남대·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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