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6:35 (일)
[딸깍발이] ‘다름’과 ‘틀림’
[딸깍발이] ‘다름’과 ‘틀림’
  • 박경미 편집기획위원 / 홍익대·수학
  • 승인 2008.12.31 15: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연구실의 난이 비실비실 죽어가고 있었다. 생명력을 느끼고자 화초를 키우는데 굳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아 화훼단지를 찾았다.
동양란에 대해서 문외한인지라 비슷비슷해 보이는 난의 가격이 천차만별인 것에 놀랐다. 난의 모양이나 가격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철골소심’과 ‘달마’였다. 잎의 골이 깊고 강건한 느낌을 주는 ‘철골소심’은 유려한 잎을 지닌 ‘달마’ 가격의 몇 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나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난의 가치를 매겨보라고 한다면 짧고 통통한 잎의 달마보다 품위와 운치가 있으면서 기개가 느껴지는 철골소심을 높게 책정할 것 같다. 그날 결국은 가장 저렴한 철골소심을 샀지만,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철골소심의 가치는 달마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사회의 틀 안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상, 남들이 정해 놓은 가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그에 너무 얽매이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런 경향은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형성되고 강화된다.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다 귀국한친구가 예전에 들려준 이야기이다.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유치원에서 동물원으로 소풍을 가서 그림을 그리게 됐다.
동물원 풍경은 미술학원에서 마르고 닳도록 연습한 주제이기에 상당수의 그림은 유치원생답지 않게 수려했다.

그런 가운데 친구의 아이는 도화지의 거의 전부를 검게 칠하고, 구석에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뭔가를 그렸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깜깜한 밤에 수위아저씨가 동물원을 순시하는 장면이라고 했다. 즉 구석에 그린 게 수위 아저씨의 손전등에 비춰진 부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림은 평균적인 그림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그 친구는 며칠 후 유치원에 불려가서 혹시 결손가정인지, 아이에게 정신적인 문제는 없는지 심문을 당해야만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국어시험을 봤는데, ‘거북이’와 ‘엉금엉금’을 이어야 하는 연결형 문항에서 ‘성큼성큼’과 짝짓기 해 틀렸다. 그렇지만 아이의 항변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은행 수족관에서 본 청거북이는 천천히 기는 동물이 아니라 민첩하게 움직이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동화 ‘토끼와 거북이’로부터 거북이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는 아이들에게는 ‘거북’과 ‘엉금엉금’의 결합이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빠르고 느린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며, 거북이에게는 ‘엉금엉금’ 이외에도 여러 속성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단어와 결합시킬 수 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공인된 생각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타당성을 따져 보고, 자신의 견해에 들어 있는 오류를 수정해 감으로써 사고와 인식의 수준을 끊임없이 상승시켜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그런 능력을 길러줄 여유는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차이’를 받아들이는데 인색한 것 같다. 누군가가 나와 생각이 다를 때 ‘생각이 틀려’라고 말한다. 이 때 ‘틀리다’는 ‘잘못됐다’가 아니라 ‘다르다’를 함의한다. 하나의 생각으로 합치되는 것을 기준으로 보니 ‘다름’이 ‘틀림’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입시에 얽매인 중·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에서는 생각의 ‘다름’이 존중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요즘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대학 교육이 전문대학원이나 자격시험의 준비 성격을 띠게 되면서, 평균적인 벽돌 찍기 식의 교육이 대학까지 침범하고 있다. 나의 경우 사범대 재학생들의 최우선 관심사는 교원임용시험이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와 기대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강의 때 교원임용시험기출문제를 분석하고 모범답안을 알려줘야 한다. 단과대학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재학 기간 동안 영어 공인 점수 등 소위 취업 ‘스펙’을 갖추느라 바쁘다. 남과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인식의 상대성을 깨닫고 자신의 고유한 사고를 체계화시키는 교육은 이제 대학이 아닌 대학원으로 이양해야 하는가 보다.

박경미 편집기획위원 / 홍익대·수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