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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관계의 딜레마
[學而思] 관계의 딜레마
  • 민윤기 충남대·심리학
  • 승인 2008.12.23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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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레이몬드 그린이 쓴 『티칭 팁스(Teaching Tips)』에는 연구실 근무시간의 효과적인 활용방안이 언급돼 있다. 그것은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많은 측면에서 잇점을 안겨준다. 책의 요지는 교수의 연구실 근무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때 교수법의 첫번째 원리인 학생-교수 접촉을 고무시킨다는 것이며, 또한 학생들과의 의사소통과 래포(rapport) 형성의 기회가 증가된다는 것이다.

모든 교수들이 이러한 사실을 분명 인지하고 있지만, 최근 대학에 불어 닥치고 있는 각종 개혁 조치와 변화의 바람은 교수들의 본연의 업무인 교육과 연구이외에도 각종 행정이나 계획, 정책입안 등의 과중한 업무를 부여함으로써 학생들과의 여유롭고, 자연스런 접촉을 방해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너하고 면담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딱 5분간 시간을 줄 테니, 용건을 간단히 말해라!” 오래 전 이야기지만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영어로 의사소통이 원활히 되지 않을 당시 지도교수와 관계를 돈독히 해볼 심산으로 사전 약속도 없이 연구실을 찾았다가 들었던 첫 마디이자, 미국에서 겪은 첫 번째 심리적인 충격 사건이었다.
결국은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한 학기 만에 다른 주에 있는 학교로 옮기고 말았다.

그런데 옮긴 학교의 지도교수는 전 학교의 지도교수와는 전혀 달랐다. 필자가 원하면 아무 때나 연구실을 방문해도 좋다는 특권을 주었던 것이다. 외국인 학생을 처음 받아본 지도교수의 호기심도 있었지만, 예외적인 배려였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교수가 된 뒤  꽤나 오랜 세월을 약속도 없이 불쑥 연구실로 방문하는 학생들 때문에 연구에 지장을 받는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어떤 경우에는 연구실 문을 잠가놓고 지낸 적도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 학교생활은 매우 공식적이고, 학생들은 성가신 존재로 각인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다 한 학생과의 조우는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됐다. 그나마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학과 학생회장이었던 그는 1년 동안 필자에게 심하게 혼난 학생이었는데, 학생회 일을 한다는 핑계로 수업 시간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고, 시험 성적은 물론, 술과 담배로 찌들어 지낸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학기인가 그 학생이 내 수업에서 시험을 매우 잘 보았다. 그래서 그 학생을 불러 칭찬을 약간 해줬다.

이후 그 학생은 확 달라졌고, 한 순간 공부는 물론 기타 대학 생활까지 모범생이 됐다. 지금은  필자의 대학원생이 돼 연구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나는 학생들의 단점보다는 조그만 것이라도 장점을 부각시키기로 했고, 이것이 매우 큰 효과를 보고 있다.

학생들에게도 내 연구실은 아무 때나 개방돼 있음을 항상 주지시킨다. 교수의 수업 외 시간을 얼마나 학생들에게 베풀 것인지, 아니면 그 시간을 줄여 연구에 좀 더 치중을 해 연구 성과를 낼 것인지, 이 문제의 핵심은 심리학에서 재개념화라고 하는 생각을 바꾸는 것일 게다. 사실 약속도 없이 연구실을 방문하는 학생들에게 시간을 할애하다보면 학생들과의 관계와 의사소통이 증가할 수 있지만, 교수의 일이 지장을 받을 수 있고, 사전 방문 약속을 정하고 학생들을 그 시간에만 면담하는 것은 교수의 일을 많이 할 수는 있지만, 나의 미국 첫 경험처럼 학생들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교환관계가 있다.

나는 이제 학생을 위해 시간을 할당해야 한다는 대 전제를 가지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대학자율화니 법인화니 해서 내가 몸담고 있는 국립대의 경우는 크나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당연히 연구와 교육이외에도 교수가 해야 하는 일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다. 얼마 전에는 초읽기에 몰린 원고 때문에 정신없이 워드작업을 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보고 싶어서요”라고 말하면서 학생들이 연구실을 찾아왔다.

벌써 두 번째 동일한 상황에서 정중하게 연구실 입성을 거절당한 학생들이었다. “이번에는 쫓아내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학생들을 이번에는 차마 돌려보낼 수 없어서 30분을 잡담으로 보낸 적이 있다.
사실 학교 안에 있을 때 어느 시간이고 학생들을 위해 배려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뒤, 이런 일들은 나를 괴롭히는 일들이 이미 아니다. 이는 수업 시간에도 영향을 주어 학생들과 매우 유기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짐을 느끼고 있다.
정말 생각을 바꾸고 나니, 학교생활이 즐겁기만 하다.

민윤기 충남대·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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