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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진부한 ‘윤리’의 이름으로
[딸깍발이] 진부한 ‘윤리’의 이름으로
  • 김혜숙 편집기획위원/이화여대·철학
  • 승인 2008.12.0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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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논문심사를 앞둔 학생이 찾아와서는 심사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면서 편지봉투를 내게 주고 갔다.
편지로 생각하고 무심히 열어보다 한 장의 수표를 발견하고는 놀라고 화가 나 다시 불러 돌려주었던 기억이 있다.

예체능 계열 논문심사를 하다보면 학생들이 부담하는 과도한 대접에 몹시 불편해지는데, 어쩌다 듣게 되는 예능계열의 소위 관행이라는 것들은 같은 교수로 자괴감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한다. 한 미술대학의 입시 비리를 같은 대학 교수가 학교에 고발한 사건을 보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교수집단의 직업윤리를 생각하게 된다.    

대학은 비교적 사회로부터 많은 특권을 누려왔다. 교수가 가진 지적 권위는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아왔고 대학 사회는 사회적 양심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학의 특권은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서 13세기 초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은 대학 구성원에 대해 불법을 행사한 시민을 재판하고 투옥할 수 있는 재판권까지 획득했다. 이런 특권은 이후 교회권력에 밀리면서 사라졌지만,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경찰의 대학 내 진입과 같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세속화가 이루어진 오늘날의 대학은 지성의 전당이라기보다는 교양과 직업을 위한 장소로 돼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교수들의 의식이나 자질 또한 변모했다.
연구비로 대학이 경쟁하는 체제가 되다 보니 연구비 수주나 관리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논문수가 교수의 자질을 재는 중요 척도가 되다 보니 대필이나 표절 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예술대학의 경우 학생이나 교수 평가의 기준이 객관적으로 표준화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어서 잡음이 발생할 소지를 항상 안고 있다. 학부모가 교수 전시 작품을 사주는 일, 레슨이나 악기를 매개로 학생과 교수가 얽히는 일들은 익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독립적인 전문 예술 대학이 따로 있지 않고 주요 대학 안에 설치돼 있는 우리나라의 사정에서 예술 대학의 교수들은 예술가와 교수 사이의 어정쩡한 위치에 서있다.

그러다보니 이론 교육과 실기 교육이 이도저도 아닌 형태로 교육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과열돼있는 입시 체제와제자들을 통한 입시생 교습은 예술 대학 교수들이 빠지기 쉬운 또 다른 함정이다.
대학이 자율과 자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책임과 자정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한국 대학과 같은 지배구조와 의사소통 구조 안에서 과연 대학은 자율을 주장할 수 있을까.

한 집단이 마음먹고 부정을 공모한다면 내부 고발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그 부정이 밝혀지기는 매우 어렵다. 전문가 집단일수록 그것은 더 어려운 일이 된다. 부정을 합리화하는 논리까지 전문적 차원에서 마련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법체계를 갖추고 있어도, 또 아무리 정교한 연구자 윤리규정을 마련하고 있어도, 개인들이 그것을 피해 부정한 일을 하고자 마음먹고 그런 규정을 무력화시키고자 한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한 사회를 만들고 있는 법체계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모든 이들이 그것을 피해가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골몰해 법을 무력화시킨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법을 어기고도 모두가 떳떳해 ‘준법투쟁’이라는 웃지 못 할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사회가 아닌가. 바뀌어야 하는 것은 법인가, 사회인가, 인간인가.

자신의 특권을 주장하고 자율권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대학은 한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지성능력 뿐만 아니라 대학 사회를 스스로 규율하는 윤리적 능력 또한 갖춰야 한다. 직업과 관련한 윤리적 능력의 함양은 개인의 덕성을 함양하는 것과는 다르다. 입시부정을 저지른 교수도 자애스러운 아버지, 선한 남편일 수 있다.
어떻게 대학의 윤리적 능력을 키울 것인가는 대학을 구성하는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김혜숙 편집기획위원/이화여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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