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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흙도 없이, 뿌리도 없이
[문화비평] 흙도 없이, 뿌리도 없이
  •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 승인 2008.09.16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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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영 인하대·영문학
지금 우리시대를 돌아보면 과연 우리에게 앞으로 희망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과다한 경쟁 때문이 아니다. 온통 오염된 먹거리 때문도 아니다. 갯벌이 상업용지로 매립되고, 아름다운 강들이 대운하로 뚫리기 때문만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삶이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더 뿌리 뽑히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생명의 본질인 흙으로부터.

‘인간’이라는 영어단어 human이 흙을 뜻하는 라틴어 humus에서 나왔고, ‘인간의 본성’을 뜻하는 영어단어 human nature에 자연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은 흙에서 멀어져서는 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삶의 문화도 흙에서 멀어지면 꽃필 수 없다. 왜냐하면 ‘문화’라는 영어단어 culture도 땅을 경작하다는 뜻의 라틴어 colere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땅을 경작하며 그 땅에 뿌리내리려던 공동체의 노력이 바로 인류가 남긴 모든 문화의 근본이었다. 따라서 흙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나아가 흙을 보살피는 육체노동을 존경하지 않는 문명에서 결코 온전한 인간본성, 좋은 공동체문화가 나올 수 없음은 물론이다.  미국의 현대시인인 웬델 베리는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본질을 ‘노숙 문명’으로 봤다.
자본주의는 어떤 존재건 원래 태어난 자리에 오래도록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 오래 뿌리내리는 것들은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나무는 뿌리를 잘라야 재목으로 팔 수 있고, 농부는 고향땅을 떠나야 기업이 바라는 값싼 임노동자가 될 수 있다. 자본은 1 달러로 가장 오래 부려먹을 수 있는 인력을 찾아 지상의 가난한 나라들을 떠돌고, 생존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 1 달러를 벌려고 정든 가족과 고향땅을 등진다. 산업사회는 사람들이 흙으로부터 멀어
질수록, 자꾸 여기저기 옮겨 다닐수록 더 강한 경쟁력을 갖게 된다고 부추기기에 이렇게 떠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자본주의 문명이란 본질적으로 집을 떠나라고는 부추겨도 집으로 돌아오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기에 바로 노숙문명이라고 한 것이다.

모두가 뜨내기인 노숙문명에서의 노동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돈을 버는 데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땅을 돌보고, 땅을 지키는 데서 노동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흙과 거리가 먼 노동에 종사할수록 그 노동은 돈이 되고 권력이 된다.

따라서 농부의 육체노동은 가장 부끄러운 것이 되고, 지식전문가나 정치가의 언어노동은 가장 부러운 것이 된다. 농업은 마구잡이로 모욕해도 좋은 1차 산업이 되고, 금융서비스업은 선진국진입의 보증수표인 3차 산업으로 추앙된다. 생명을 길러내는 흙은 천시되고, 탐욕만 길러내는 돈은 숭상된다. 이렇게 돈을 쫓아 뿌리도 없이 떠도는 자본의 뜨내기들에겐 어떤 장소든 소중히 다룰 이유가 전혀 없다.

각종 굴뚝산업을 가난한 제 3세계로 이전시키는 다국적기업들처럼 어느 한 곳이 더러워지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이윤이 개개인의 삶의 전부가 되고, 무한한 경제성장이 공동체의 목표가 되는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이건 자연이건 모두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되기에 불성실과 무책임이 사회전반에 역병처럼 만연하게 된다. 물론 병에 걸린 문명이 오래 갈 수는 없다.

정치경제학자인 칼 폴라니의 지적처럼 자본주의 산업문명이란 인류전체의 장구한 역사에서 보자면 실제로는 불과 찰나다. 수천년 동안 인류는 돈이 아닌 흙에 의지해서 살아왔으며, 농사일을 마치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영혼 없는 상품처럼 여기지도 않았다. 모든 토착적인 민중공동체는 언제나 특정 장소에 대한 제한된 책임과 이웃에 대한 무한한 환대를 가장 귀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삶의 지혜와 기술은 사람들이 땅에 뿌리박고, 땅을 돌보며 책임 있게 살 때 비로소 후대에 전승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델 베리도 땅을 돌보고 가꾸는 농사야말로 가장 고결하고, 책임 있게 사는 삶의 방식이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마음대로 옮겨 심은 식물이 잘 자랄 수 없듯이 사람도 이리저리 뜨내기로 살면서 굳건한 뿌리를 내릴 수는 없다. 흙도 뿌리도 없이 살 수 있는 식물이 거의 없듯 사람도 집도 고향도 없이 잘 살 수 없다.

‘이주’와 ‘이식’이 마치 정기 건강검진처럼 자발적 강제가 돼버린 지금과 같은 산업사회에선 가능한 한 같은 장소에 오랫동안 뿌리박고 사는 것이 비정한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흙의 문화를 지켜내는 가장 절박한 저항이 될지도 모른다.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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