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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테세우스를 몽상하며
[학이사] 테세우스를 몽상하며
  • 김정희 광주여대·보건복지학
  • 승인 2008.09.16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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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생면부지인 한 타인의 전화를 받았다. 학자적이 되기를 포기한 지 오래라 修學수준이 적절치 못하다는 말씀에도 나눔의 글을 청탁한다고 했다. ‘전공분야의 특정주제를 비전공교수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하는 글을 요청한다 했다. 그런데 여러 복잡한 이유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주제라는 느낌과 동시에 그때 머리에 떠오른 것은 실로 엉뚱한 기억이었다.

그날 일은 이러 저러한 이론들을 동원해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에 소재하는 교수신문의 기자가 지방 한 지점의 이름 없는 선생을 어찌 알고 왜 연락을 했을까?’ 등에 대한 분석 의사가 발현할 만한 일대 사건에 해당된다. 그런데 일상에서 흔히 기대되지 않는 일에 대한 호기심어린 의문이 아닌, 오래 전 어린 시절에 읽었던 공상과학소설의 내용이 상기됐다. 탐독한 공상과학소설 중 탐사우주선에 관한 그 소설이 유독 오랜 기간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은 전문 학문분야에 관한 독특한 메시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구 전역에서 선발된 최고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그 우주선에서 동료들로부터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진화생물학의 전문가, 독성학전문가 등과 같이 각 학문영역에서도 세분화된 분야의 수직적 전문가들이 대부분인 그곳에서 한 학문의 전 범위를 다루는 수평적 전문가인 그는 늘 폄훼의 대상이었다. 상대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비전공자이자 소속이 애매한 그의 학문적 특징은 그 우주선 사회에서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없어 무가치하고 소외되는 이유였다. 그런 그가 우주선 내에서나 탐사행성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마다 그 상황의 마지막에 등장해 해결하는 이로 그려진 것이다.

응용학문이라 분류된 영역의 길만 따라왔던 受學경험은 특정 문화적 상황에 의한 적응장애를 경험케 하는 데 일조한 것 같다. 응용학문을 추구하는 데 인문과학,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이라는 구분의 성벽을 쌓을 이유가 없다. 전공과 비전공이라는 배타적 경계에 따른 다름을 전제로 전공의 경중을 따져 차별로 표현할 까닭도 없다. 탐구해야 할 주제하의 지식은, 특정 집단이 지정해 둔 경계에 관계없이, 수집되어 문제규명과 해결을 위해 적용돼야 할 수단적 대상일 뿐이다. 목적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있다.

이렇게 요구되는 학문적 덕목을 기르기 위해 감수성 훈련과 그에 대비되는 목표정향 훈련, 다학제(interdisciplinary) 팀 훈련, 그리고 비교문화 등의 과목들도 수강해야만 했다. 자신의 몰입이 요구됐기에 고통스런 감정적 과정을 겪게 한 과목들이기는 했으나 그런 교육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기회에 감사하는 마음에는 늘 변함이 없다. 고통만큼 눈을 열고 자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육훈련에 기인한 변화 수준만큼 단일 학제 중심의 사고와 세계만으로 이뤄진 전공 영역의 구성원을 만날 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인 느낌과 고통이 증가되는 역설적 현실이다.

인류의 복지증진을 목표로 한다고 배웠던 공중보건학은 ‘분화’의 존재와 필요성을 인식한다. 핵심은 이를 이어 줄 수 있는 ‘교통’과 문제해결을 위한 ‘통합’이라는 화두이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관련된 제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Public’이며 다학제간 팀 접근방법이다.

아울러 이러한 용어의 형식적 사용이 아니라 외형적 명칭과 내재적 목적이 일치된 개념이해가 요구된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프로크루스테스적 체계를 자주 요구한다. 내게는 공중보건과 연관되지 않은 학문분야가 거의 없고 그 경중을 수직체계화 할 연유가 없으니 슬플 따름이다.
대한민국 내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유행처럼 WHO연맹가입을 서두르는 듯 보이는 ‘건강도시’의 경우도 유사한 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의 도시 거주민인 우리와 미래의 잠재적 거주민까지 포함해야 하는 건강도시는 그 기본 원칙을 따르기 위해 학제간 통섭과 통합을 전제로 한다. 내게는 거의 모든 학문분야가 다 참여해야 하는, 분화의 성공적 교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우리들의 일’로 보인다.

원점으로 돌아가 천천히 준비하고 모두에게 열어야 한다. 생면부지의 타인과 내가 연결돼 우리가 되는, 그래서 ‘당신들만의 우리’가 아닌 문화적 차이의 이해에 토대한 교수,학자들의 나눔의 교통으로 성취되어 가는 진정한 ‘우리’를 꿈꾸어 본다. 공중보건의 이상이 구체화되는 인간사회를 꿈꾸는 나는 사실 초학제를 지향하는 몽상가인가 보다.

김정희 광주여대·보건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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