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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한국과 프랑스의 영어 스트레스
[대학정론] 한국과 프랑스의 영어 스트레스
  • 박정자 논설위원 /상명대·불문학
  • 승인 2008.09.0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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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초조감이건, 미국 문화의 침투이므로 배격해야 한다는 거부감이건, 노숙자와 고령자만 빼고는 세 살짜리 아이부터 80 노인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프랑스어 전공자들의 거부감이 특히 심하다. 영어 열풍으로 인해 프랑스어 전공 학생들이 줄어든다는 생계의 위기감 때문이기도 하고, 프랑스 문화를 내면화해 스스로 프랑스인들과 똑같이 사고하는 습관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스인들의 반미 감정과 영어에 대한 거부감은 아마도 세계 제일이다.
미국에서 몇 년 전 프렌치 프라이를 프리덤 프라이로 바꾸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양국 국민들의 감정이 악화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높은 문화와 프랑스어에 대한 자부심으로 미국의 우월적 지위와 영어의 세계 석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프랑스도 영어가 전 세계에 통용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낮은 영어 구사 능력이 국가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프랑스의 국제적 영향력을 하락시켰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프랑스는 금년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영어라고 못 박지는 않았고 외국어 중에서 학생들이자유롭게 하나를 선택하는데, 86%가 영어를 선택하고 있다. 그 동안 프랑스인들도 우리처럼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영어로 자유롭게 토론하거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지난 9월 1일 자비에 다르코스 교육부 장관은 프랑스 젊은이들이 영어를 너무 못한다고 운을 뗀 후, 요즘 세상에서
국제어인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장애’라고 까지 말했다. 내년부터 방학 중에 고교에서 무료로 원어민 영어 강좌를 개설하겠다고 발표하는 장소에서였다.

“부유한 가정은 해외연수를 통해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가정의 모든 아이들에게 국내에서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하는 다르코스 장관의 말에서는, 이것이 한국인지 프랑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는 또 의무교육만 마치면 프랑스의 모든 젊은이들이 프랑스어와 영어의 이중 언어 사용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도 했다. 광고에 영어를 쓰면 벌금을 매기던 나라에서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인들의 영어 거부감은 일차적으로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반감이다. 물론 언어는 지배권과 상관이 있다. 미국이 전 지구적 정치를 하고 있는 강대국이기 때문에 미국식 영어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언어와 권력과의 관계는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어서, 로마가 주변국가에 강제했던 평화, 즉 팍스로마나는 로마에서 비잔틴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으로 보급됐던 라틴어 덕택이라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기원 원년 줄리어스 시저가 지금의 프랑스인 골(Gaule) 지방을 정복했을 때 새롭게 귀족 계급으로 부상한계층은 라틴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지배자의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피식민 민족의 상류 계층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우리처럼 생생하게 체험한 민족도 없을 것이다.

언어와 권력 관계는 그것대로 인정하더라도 좀 더 실용주의적이고 열린 사고를 할 필요는 있다. 
프랑스인들이 생각하듯이, 그리고 일부 한국인들이 믿고 있듯이, 영어를 국제어로 사용한다고 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거나 모국어가 매장되는 것은 아니다. 온 국민이 영어를 잘하는 네델란드인들이 영어를 말함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잃었는가.

오히려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고 자국의 문화를 더 활발하게 세계에 전파하는 힘을 얻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영어를 좀 더 잘하게 돼 국내 모든 논문을 영어로 번역해 해외로 내보낼 수 있다면 중국 또는 일본과의 영토 분쟁 혹은 역사 논쟁에서 한국은 대등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교과서와 백과사전 혹은 정책 자료를 만들 때 참조하는 자료는 영어로 된 것이지 한국어로 된 자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는 민족주의를 방해하는 세계화의 수단인 듯도 싶지만 또 한편 생각하면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 발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박정자 논설위원 /상명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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