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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문학사와 기억의 층위
[學而思] 문학사와 기억의 층위
  • 유성호 / 한양대· 국문학
  • 승인 2008.06.16 1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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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다른 대학 대학원에 출강을 한 학기 한 적이 있다. 강의를 마치고 나니 한 학생이, “선생님은 어쩌면 그리도 야사를 많이 아세요?” 하고 묻는다. 그때는 그 말이, 당신은 왜 그런 주변적이고 너절한 일들을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일종의 트리비얼리즘에 대한 의구심으로 들렸다. 문학사란 일종의 ‘정사’인데, 왜 작가들 주변이나 매체를 둘러싼 인적 관계 등 소소한 사실들에 대한 과잉 입력을 하고 있느냐 하는 폄하 같은 게 느껴졌던 것이다.

원래 ‘正史’란 정확한 事實의 역사요, ‘野史’란 민간에서 私事로 지어 엮은 역사를 뜻한다. 혹은 정사를 ‘정식 역사서’란 의미로 해석해정사의 반대 개념으로 야사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만큼 야사는 한 단계 아래의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때 내 대답이 그랬다.

“미안하네만,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서는 정사와 야사가 따로 없네, 운운.”가령 한 작가의 생몰 연대나 작품의 발표 시기 같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팩트(fact)나 담론적 차원에서 해석된 문학사적 결과는 ‘정사’로 편입되고, 작가들의 이성 및 친우 관계나 작품과 매체를 둘러싼 학연 및 지연 같은 사실들은 주로 ‘야사’로 취급된다.

예를 들어보자. 1930년대 후반 우리 문학의 마지막 등대 역할을 했던 『문장(文章)』이라는 유명 잡지가 있다. 『문장』이 조선주의와 상고주의의 결합을 바탕으로 해 고전 발굴 및 신인 배출과 양성에 주력한 것은 정사요, 『문장』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이병기, 정지용, 이태준이 모두 휘문고보의 인연으로 인맥을 형성했고, 『문장』 발행인인 김연만은 물론이고 주요 필자인 박종화, 김영랑, 안회남, 이무영, 오장환, 박노갑, 최태응 등이 모두 휘문 출신이라는 것은 야사이다.

더구나 ‘근대’가 지연 중심에서 학연 중심으로 인적 결속의 방식을 현저하게 변모한 측면을 들어, 이 같은 학연적 결합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 문학사에서 영락없는 야사적 접근이 된다. 그만큼 야사는 확정될 수 없는 것이고, 시쳇말로 말하는 ‘~카더라’ 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문학 연구에서 이런저런 ‘야사급’ 사실들은 작가나 작품의 속성 및 가치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나는 한국 근대문학 가운데 근대시 연구자로서의 자의식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을 ‘기억의 언어’를 전공하고 있다고 달리 말하곤 한다. 나는 모든 형태의 ‘기억’이 중심-주변의 위계를 해체하면서 사실들 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호혜적으로 작동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특별히 ‘기억되지 않는 기억’의 자료적 중요성을 매우 중시한다. 그 점에서 ‘야사’로 폄하된 근대 작동의 원리들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시대는 형이상학과 正典의 급속한 와해를 현실화하면서 다가오는 온갖 종언주의(endism)에 둘러싸여 있다. 이때 ‘시’는 희미하고 모호하고 복합적인 ‘기억’의 역학을 통해 그 종언의 선언성에 저항한다. 그래서 나는 근대시의 속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리를 ‘기억’으로 보고, 그 ‘기억’이 고고학자의 시선처럼 현재의 지층 속에 화석의 형식으로나 있을 법한 오래된 질서들을 발견하고 재현하는 어떤 힘임을 발견하고 있다.
특별히 그것을 근대시를 통해 발견하면서, 형이상학적 중심의 부재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의 척박함과 가벼움을 극복해가는 기율과 비의가 그 안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작가나 시인들에 대한 ‘기억’에, 정사와 야사가 따로 있을 리 없다. 정사와 야사를 구분해 상하 관계로 위계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학문적 엄숙주의와 체제 친화의 산물이다. 정사가 유일한 구심적 영토가 아니듯이 야사가 僞史는 더욱 아닐 것이다. 더구나 작가나 작품들의 기록되지 않은 기억인 ‘무의식’은 정사와 야사라는 투박한 이분법을 넘어서게 마련이다. 그만큼 한국 근대문학은 근대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자의식을 증언하는 실체이다. 그래서 근대를 구성했던 소소한 사실들마저 근대의 속성과 실체를 밝히는 데 종요로운 것이고, 우리의 학문적 探針은 그것을 풍부하게 겨냥하는 것이다.

 유성호 / 한양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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