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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소명을 깨닫기까지
[學而思]소명을 깨닫기까지
  • 이용기 / 영남대 · 농업경제학
  • 승인 2008.06.0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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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 생활을 접고 학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건 내 나이 마흔을 바라볼 무렵이었다. 불혹이 가까운 늦은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고 인생의 진로를 바꿀 수 있었던 건 국비 해외 훈련 프로그램으로 일리노이대학에 파견됐던 게 계기가 됐다. 농업경제학이 내 전공분야가 된 것도 당시 공무원으로 농림수산부에서 근무한 인연 때문이었다.

농업경제학은 경제 이론과 방법론을 농업과 농업관련 사회현상을 대상으로 적용하고 연구하는 응용경제학이다. 그런데 학문의 길로 들어섰던 초기에 나는 이 농업경제학에 큰 매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사회적으로도 농업과 관련된 학문 분야들은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농업이 위축되고 사회적 수요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농업경제학에 대한 인식도 낮아져 대학 지원자 수가 줄고 사립대학들은 학생 유치를 위해 농업 대신 생물자원, 식품산업, 생명산업 등으로 학과의 명칭까지 바꿔 나갔다. 이처럼 농업은 우리 사회와 대학으로부터 외면을 받아왔지만, 이 분야의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 자신도 이런 사회적 흐름에 묻혀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농업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와 함께 농업의 국가·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인식도 낮아지고, 나아가 관련 학문분야까지 위축돼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와 환경이 어떻게 변한다 해도 농업의 본질적 기능은 변할 수 없고, 그 중요성도 퇴색될 수 없는 것이다. 작년부터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식량파동이나 최근 국내에서 일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문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나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개발어젠더(DDA) 무역협상 등 이 모든 국내외 주요 이슈들의 중심에는 항상 농업이 자리하고 있다. 농업의 문제, 식량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데도 막상 농업 관련 직업이나 학과를 선택하는 문제에 직면해서는 사람들의 인식은 냉담해진다. 대학들이 생존을 위해 명칭까지 자주 바꿔나가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산업의 가치를 사람들은 보통 그 산업이 생산해 낸 산출물의 화폐적 크기로만 평가한다. 농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도 오직 농업 부문의 GDP의 크기로만 본다. 농업 관련 학과들이 위축되고 본질의 변함이 없는데도 포장과 외연을 바꿔 나가는 자기모순 속으로 빠져드는 이유이다. 농업의 가치는 단순히 시장에서 평가되는 농업 산출물의 GDP의 크기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평가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산업과 달리 농업은 식량안보, 자연과 환경보존, 국토균형발전 등과 같이 국가·사회 존립에 핵심이 되는 다원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은 물론 삶의 질과 직결돼 인류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산업이다. 3%에 머물고 있는 한국의 농업 GDP는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이지만 이런 농업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 수 없다.

농업이 바로서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 세계 어디에도 농업의 발전 없이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 농업자원과 자연자원이 점차 고갈돼 가고 지구온난화가 진전되는 상황에서 미래에는 농업과 식량자원을 확보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강국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농업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일찍이 스웨덴의 노벨경제학자 뮈르달(Gunnar Myrdal)은 이렇게 말했다.
“장기적 경제발전 전투에서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는 농업 섹터에 놓여있다.” 오늘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한다.

농업을 경시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관련 학문에 대한 기피 현상이 지속된다면 뮈르달의 말처럼 장기적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의 선진국 진입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 역시 한 때 사회적 추세에 휩쓸려 자신의 전공분야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때를 부끄럽게 느끼고 있다. 이 길이 나의 소명이란 걸 알게 된 건 세월이 한참 더 흐른 후였다. 사회과학으로서의 농업경제학은 실천적 학문이다. 농업이 다른 산업과, 그리고 농촌이 도시와 균형적으로 잘 발전된 미래 선진국의 모습을 만드는 중심적 역할은 농업경제학의 몫이다. 농업이 왜 중요한 산업인가를 젊은 학생들과 국민들에게 일깨워주는 것 역시 농업경제학도들의 사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분야,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분야.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 있다고 믿기에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간다.

이용기 / 영남대 · 농업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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